A propos de...



pop out! (ver.100108)

#1
 요즘, 자꾸만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을 통해서 견고한 무언가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두 개의 부정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내가 찾는 것은 물을 부어 굳혀놓은 모래성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2
 기어서라도 과외는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과외를 갔으나... 엄마야, 나 얘 어떡하니ㅠ

#3
 만년 놀고 먹는 대학생의 팔자는 몇날 며칠이 지나도록 필통은 가방에 박아두고, 연필은 한 열흘 만에 잡아서 글씨를 쓰면 무슨 초등학생 글씨 쓰듯 삐둘빼뚤 쓰는 맛이 있다. 거기다가, 빈둥거리는 꼴을 한심하게 여기시는 엄마의 의미 있는 시선 쯤은 가뿐히 넘겨주는 내공은 필수. 그래도 예습을 할 양심 쯤은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4
 올해는 기필코 다이어리를 쓰겠다는 일념 하에 학교에서 세일할 때 다이어리를 하나 구입했다. 물론, 좋은 걸 사봤자 몇 주 지나고 나면 책상 서랍 속에서 백만 년 묵은 먼지랑 인사하고 있단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아주아주 싸고 아주아주 simple한 걸로.(심지어 다이어리 표지에 적혀 있는 상표명도 'How to simplify the life'이다. 얼마나 simple한지..) 친구의 표현에 의하면 나에게 건망증이 있단 사실도 깜빡깜빡 하는 이 마당에 그나마 좀 덜 까먹어 보겠다고 발악이라도 하는 거라는데.
 사람이 어떤 행동을 습관으로 만드는 데에는 약 66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1월 1일부터 66일이면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핸드폰에 넣으면 계산을 해 주겠지만 핸드폰 비밀번호 푸는 게 귀찮아서 넘어간다.) 66일째 되는 날은 확실히 3월의 어느 날에 떨어진다.(불어식 표현...) 3월이라... 아무래도 66일을 다 못 채우고 다이어리 실종신고를 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5
 요즘 무슨 신생아 때 처럼 자는 것 같다.

#6
 도대체 어디까지 서툴 수 있는 것인지.

#7
 여자는 남자가 거짓말을 하면 대개는 단박에 알아차린다. 근데 더 웃기는 건 모른 척 해주면 진짜 모르는 줄 안단 거다. 흥.

#8
 사람들은 나한테 '너는 네 할일을 알아서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들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건지.    
     -10:25, at 나랑은 하등의 관계도 없는 법학 도서관에서 5분 남기고도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학회원들을 기다리며.

뽀뽀뽀에 관한 고찰_OMG!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헤어질 때 또 만나요 뽀뽀뽀, 우리는 귀염둥이 뽀뽀뽀 친구, 뽀뽀뽀 뽀뽀뽀 뽀뽀뽀 친구!"

  엄마야, 이게 뭐라냐. 치과에서 이어폰 꼬나끼고(!) 거만하게 앉아있는데 Bruno Pelletier님의 우월한 불어 발음을 누르고 들려오는 더 우월한 추억의 노래....! 난 뽀뽀뽀 노래는 '엄마가 안 와' 뭐, 이런 유머성 노래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 뽀뽀뽀의 재발견이었다. 아직도 뽀뽀뽀를 하는구나...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보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근 10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뚝딱이가 나오는 딩동댕 유치원은 그 후로도 자주 봤던 것 같은데) 정말로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는 뽀뽀뽀에 감회가 새롭다. 아직까지도 뽀뽀뽀를 한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내가 주된 시청자를 구성하는 연령층에 속했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방송 수준에 한 번 더 놀라고, 하필이면 이걸 치과 대기실에서 봤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오늘의 주제는 세계의 여러가지 거주 형태였는데(거주 형태? 가옥 형태? whatever.) 알래스카, 그리스, 말레이시아, 그리고 몽골의 집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후, 그 중에서도 북극의 이글루를 말 그대로 '심층 분석'했더랬다. Oh mon dieu! 난이도가 장난이 아닌데?! 하지만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어 몰입교육의 최근 추세를 반영이라도 하듯 이어지는 영어 동화와 '무려' 문단열씨가 등장하는 영어 파닉스 시간. 뭐였더라, 방귀 뀌는 며느리였나, 왜, 방구를 무지 뀌는 여자가 문짝 떨어지게 방귀를 뀌었다가 시댁에서 쫓겨나는데, 방귀 소리로 도둑도 잡고, 방귀 바람으로 딴 배가 임금님 수랏상에 진상되고, 하여간 그래서 다시 남편이랑 시부모님이랑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영어랑 한국어를 섞어서 들려주는데... 여보세요, 뽀뽀뽀 시청자 평균 연령이 어떻게 되던가요? 우리 때랑 시대가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면 요즘 아이들도 분명 아침 시간이 바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침 방송이랑 빠이빠이를 할텐데, 7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저걸 알아듣는다굽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건, 실제로 알아듣기를 기대하는 것이건 간에 우리 나라 7세 이하 아동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이 저 정도라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수준의 영어 방송을 능숙하게 보는 아이들 중에 한글을 제대로 뗀 아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러고는, 이제는 얼굴만 봐도 웃긴 문단열 아저씨의 파닉스 시간이 이어졌다.(*) 오늘 배운 단어는 roof였는데, 한국어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영어 발음을 곧잘 따라하는 걸 보면서 씁쓸함은 훌쩍 늘어난다. 마치 쪼글쪼글한 고무 풍선에 바람이라도 훅 불은 것처럼. 이런 걸 세대차이라고 하는 걸까.

* 동생은 문단열씨가 뽀뽀뽀 파닉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폭소를 금치 못했다. 왜일까? : D

  나는 'TV 유치원 하나 둘 셋' 세대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4살, 처음으로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실제 유치원에서 하는 활동들은 'TV 유치원 하나 둘 셋'에 나오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더랬다. 아, 어린 날의 배신감...! 
  'TV 유치원 하나 둘 셋' 오프닝송의 가사가 궁금해졌다. 기억나는 부분은 '우르르쾅쾅 모두모두 모여라, 하나 둘 셋' 하는 맨 마지막 부분 뿐, DAUM에서 검색하니 결과가 마땅치않다. 게다가 'TV 유치원 하나 둘 셋'으로 검색하니까 이건 뭐, 주제가가 바꼈는지 다른 노래만 잔뜩 뜬다. 맙소사. 그래서 NAVER로 건너오다. '우르르쾅쾅 모두모두 모여라, 하나 둘 셋'을 넣고 엔터를 치는 순간, 만세!

떠들썩 떠들썩 들썩들썩 떠들썩
떠들썩 떠들썩
하나 둘 셋~!
들썩들썩 떠들썩
와글 와글 우르르 쾅쾅
모두모두 모두모두 모여라
하나둘셋 하나둘셋 나라로
하하 호호 재밌는 얘기
좋아 좋아 신나는 친구
다같이 크게 크게
하나 둘 셋
떠들썩 떠들썩 들썩들썩 떠들썩
들썩 들썩 떠들썩
와글 와글 우르르 쾅쾅
모두 모두 모여라 하나둘 셋

출처 : http://blog.naver.com/kdj0253?Redirect=Log&logNo=30075095607


  그래, 이런 노래였어... 가사를 보니 새록새록 노래가락도 떠오른다. 참, 신기하지, 좀 더 컸을 때 봤던 만화영화 주제가는 잘 기억이 안 나면서 훨씬 더 오래 된 이런 노래는 잘만 기억난다. 이래서, 다들 조기교육 조기교육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TV 유치원 하나 둘 셋'에서 했던 한글노래도 기억나는 이 마당에 오프닝송 쯤이야...!
  유치원에 갔다오면 뽀뽀뽀 - TV 유치원 하나 둘 셋 - 딩동댕 유치원으로 이어지는 정규코스를 밟았다. 정확한 방송 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어린 날에는 TV 유치원 시리즈를 다 챙겨보고 밖이 어두컴컴해지면 하루가 끝난 것이었기에 어쨌건 나의 하루는 유치원에서 시작해서 유치원으로 끝났다. 

  동생한테 오늘 치과에서 뽀뽀뽀를 봤다고 얘기하면서 방송 내용이 어땠는지 아주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줬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우리는 어렸을 때 봤던 유치원 방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명은 침대에 누워서, 한 명은 책 펴놓고 책상 앞에 앉아서.(누가 고3이야...-_-?) 뽀뽀뽀, 딩동생 유치원, 혼자서도 잘 해요, 별의별 아침 프로그램의 디테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다 튀어나온다. 

  "꺼야꺼야 할꺼야, 혼자서도 잘 할꺼야"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게 무슨 프로그램 오프닝송이었나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보던 건 아니고, 동생이 봤던 거였는데,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가끔, 오후에 해 주는 재방송을 동생과 나란히 앉아서 보곤 했었다. 병아리(!) 탈을 쓴 사람이 돌아다녔었는데... 네이트온에서 한 세 명 쯤 찌르니까 답이 나온다. '혼자서도 잘 해요'. 여기 나오는 병아리를 볼 때마다 세서미 스트리트에 나오는 그 병아리인지 오리인지 타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애가 생각났었다.

바로 얘!
알고 보니 Big Bird는 6살 먹은 카나리아였다.
얘가 카나리아라면 누가 믿어-_-;;

  하지만 역시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텔레토비! 내 동생이 우리 나라에 수입 된 텔레토비 1세대였으니까,(동생 증언에 의하면 7살 때 보기 시작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많이 보지는 못했다고 함.) 이게 언제 적 이야기니... 확실히 나는 텔레토비를 아침에 보진 않았으나 오후에 가끔, 세일러문을 보기 전에 맛보기로 봤던 것 같긴 하다. 롯데리아에서 텔레토비 다이어리를 나눠줬던 것 같기도 한데. 아, 맞아, 난 보라돌이의 그 촌스러운 분홍색 가방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매우 좋은 축에 속하는 장기기억력 덕분에(대신 단기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짧다. 심지어 붕어랑 누가 더 오래 기억하나 내기하면 붕어가 이길 지경이다.) 아직도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봤던 내용들도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단연코 우리 세대의 유치원은 순수한 '학습'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 놀이를 통한 자연스러운 배움을 유도했으면 유도했지, 벌써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내가 본 것처럼 학습만을 위한 학습이 목적이 되진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이 아니면 보내지 않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듯도 하다. 영어유치원이라니, 학습 효과가 극대화되는 곳이 아니겠는가.

  간만에 본 뽀뽀뽀가 반가웠는지, 씁쓸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 다였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한테 다시 보라고 그러면 차마 다시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 뽀뽀뽀는 대학교 3학년이 보기에도 충분히 어려웠다.

덧 : 이 포스팅은 순전히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위한 거임. 저 Big Bird 너 닮았어. 장수하는 것도!

이데올로기_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어젯밤, 자려고 정리하려던 참에 동아리 클럽에 올라온 글과 그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중립적 시선_not yet 이라는 꽤나 거창한 제목을 붙여 글을 썼다. 글을 쓴 건지, 나 나름대로 혼자서 또 열폭한 건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시간에, 그것도 퍽 충동적으로 끼적였던 걸 보면 아마도 열폭에 가깝지 않았었나 싶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단 생각에 자리에는 누웠지만 12월 말이나 1월 초쯤 해서 장염 한 번 걸려주지 않으면 도무지 1년을 시작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연중행사를 치룬답시고 안에서 배를 쥐어 뜯는데 잠이 와야 말이지. 결국 눈만 말똥말똥,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선택의 보류도 벌써 나의 이데올로기인데.

  Toute oeuvre est forme dans la mesure où elle est oeuvre. La forme, en ce sens, est partout, même chez les poètes qui se moquent de la forme ou visent à la détruire. Il y a une forme de Montaigne et une forme de Breton, il y a une forme de l'informe ou de la volonté iconoclaste, comme il y a une forme de la rêvrie intime ou de l'explosion lyrique. Et l'artiste qui prétend aller au-delà des formes le fera par les forme -- s'il est artiste.

  테마비평으로 유명한 Rousset가 한 말이다. 모든 것은 형식이기에, 형식을 뛰어넘으려는 예술가는 형식을 통해서만 형식을 뛰어넘을 수 있고 형식을 파괴하고자 하는 예술가는 형식을 통해서만 형식을 파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것도, 이데올로기를 선택하지 않는 것도 모두 이데올로기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지만 거부를 형성하는 개인의 언어도 결국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Langue는 중립적이지만 Parole은 주관적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어떤 한 현상에 대한 중립적 견해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 소망은 원천적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표상하고 있음을, 따라서 중립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왜 어제의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아, 또 열난다...

덧 : 아하...! 트랙백은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근데 핑백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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