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츠리뷰]<The Challenge(MIJI)>_시가 있는 음악, 음악이 있는 시 Contemplations(culture)

[Prologue]

  내가 가야금이란 악기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아직은 가야금이 내 키보다도 크던 2000년대의 첫 가을이었다. 작은 절의 자그마한 방, 천장에 붙어 벽을 따라 오종종 놓여있던 쉰 개 남짓한 바리들. 바다 냄새를 가득 품고 산을 넘은 바람이 파란 하늘만큼이나 붉은 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단풍을 부드럽게 흔들고는 그대로 하늘까지 올라가 구름조차 스치지 못하는 하늘에 하얗게 생채기를 내는 계절이었다. 그 날 오후, 내 키보다도 큰 가야금을 무릎에 얹은 무릎에 얹은 나는 수많은 낯섦의 이유에 때 이른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나무 그림자보다도 더 많이 떨고 있었다.


  가야금은 확실히 매력적인 악기였다.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고, 물집이 잡히고, 끝끝내는 아이의 손에 어울리지 않는 굳은 살이 심술궂게 박혀버렸지만 둥, 둥, 서양악기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그 깊은 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장중하면서도 가볍고, 탁하면서도 맑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면서도 너무너무 예쁜 울림. 어느 새 나는 조르르 모여 앉은 바리들의 춤에 맞춰 둥기당 둥당, 신나게 가야금 줄을 뜯고 튕기고, 나빌레라, 짧은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단소를 불어 제끼고 있었다.


  가야금 5년, 단소 6개월. 7년이 넘게 피아노를 배웠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국악이 좋았다. 아는 만큼 들린다고, 내 귀는 점점 더 국악에 익숙해져갔고 혹시나 어디에선가 가야금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라도 할라치면 내 손가락은 빈 무릎 위를 재빠르게 미끄러져가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국악이 왜 더 좋은지 나는 지금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그냥 귀에 더 친숙하니까.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 같은 소피스트를 백 명을 데려와도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을 얻긴 힘들지 않을까.

MIJI's The Challenge.
몰랐는데, 다른 분들 리뷰하신 거 보니까 자필 싸인이랜다.
난 그냥 인쇄된 건 줄 알았지.
결론은, 오, 나도 싸인 된 음반이 두 개다!


  'MIJI'의 음반을 신청한 것은 분명 호기심 때문이었다. 현대 국악이라고 해봐야 황병기씨처럼 아예 국악풍, 혹은 세미 국악풍의 곡을 직접 작곡하는 전문 국악기 연주자를 제외하고 나면 기존에 있었던 서양의 곡을 국악기에 맞게 편곡한 것이 대부분인지라 '국악 걸그룹'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굉장히 새로웠다. 음반사 측에서 내어놓는 광고 문구야 거의 언제나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뇌가 온 몸의 신경으로 호기심의 신호를 찌릿찌릿 내보내고, 결국에는 손가락 끝에 다다라 '렛츠리뷰 신청' 버튼을 누르게 하고, 또 '신청자 한마디'를 작성하게 한 것은 그 새로움이 낯설 만큼 새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쳐있을 때였다. 꼬박 열흘을 간 감기 때문에, 그리고 몇날 며칠 공을 들였지만 나중에는 내 생각에 깔려 짓뭉개져버린 <Matrix> 감상문(!) 때문에. 'MIJI' 앨범이 도착하던 날 학회 일로 전공진입생 OT에 다녀와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노란 봉투에 흘끗 눈길을 던졌을 뿐 포장을 뜯지도 못하고 저녁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이불 뒤집어쓰고 앓아 누워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abandon.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iTunes로 CD를 리핑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엘레베이터를 나서며 조그만 삼각형모양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나의 호기심도, 섣부른 기대도 모두 totally abandoned 된 상태였던 것은 순전히 애꿎은 피로감 때문이었다. 집에서 언어 과외하는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5분. 하지만 그 5분의 시간동안 'MIJI'의 음악은 휴지통에 구겨져있던 파일을 '선택 항목 복원' 버튼 하나로 간단하게 복원시키듯 나의 호기심도, 기대감도 모두 되살려내었다.


휴지통에 들어가는 파일은 왜 꾸깃꾸깃 구겨져서 들어가는 걸까?


  슬금슬금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에 하는 목욕은 늘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창문을 가득 채운 저녁 햇빛으로 어슴푸레 금빛으로 빛나는 시간 속에 들어앉아서는 이어폰을 끼고 다리를 흔들거리면 욕조 가득 받아놓은 터키블루색 물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글자글 아룽져 하늘거리는 것이다. 사금을 걸러내듯 오랜 생각을 걸러내기 위해 시간을 흔들어 부서지는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이어폰을 박차고 나온 'MIJI'의 음악은 고막을 때리고는 눈 앞에 갖가지 색깔로 춤추는 음표들을 무수히 그려내고 있었다. 순간, 음악과 어울리는 시를 찾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분명 바로 그 시간 되는대로 흔들거리던 물이 시간 죽이기를 멈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MIJI'의 가락은 확실히 욕조 안에서 의미없이 시간을 죽이며 듣기에 썩 좋은 음악이었다.

<K.new>
  아무 생각 없이 귀에 이어폰을 걸고 걷다 기대치 못한 음악에 깜짝 놀라게 오는 순간이 온다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오소소 훑는 그 떨림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타고난 건망증 때문에 내가 지금 막 재생시킨 재생목록이 'MIJI'의 <The Challenge>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었고, 신경회로를 타고 달음질치는 음악이 뇌에서 처리가 되지 못할 만큼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가 내가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상습범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그렇다는 항등식이 세워지는 것은 아닌 법이다. 기대. 분명 거의 아무런 기대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걸음을 놀래킨 것은 틀림없이 기대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국악 걸그룹'입네, '새로운 국악'입네 내세운다고 해도 '국악'이라는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굉장히 한정적이다. 황병기씨의 신곡을 여럿 다루긴 했어도 정통 국악을 배운 사람의 입장에서 '국악'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되었건 나름의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특유의 분위기는 국악을 규정하는 가장 큰 척도이자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국악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의 부족한 귀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이상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느닷없이 고막을 두드리는 드럼 소리에 그토록 화들짝 놀란 것을 보면.


  정말로, <The Challenge>의 첫 곡 'K.new'는 국악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야금, 해금, 생황, 언뜻 들어서도 구별이 가는 악기들은 분명 국악기였는데도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곡을 만들다보니 '국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오히려 각 악기가 지닌 특징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새로운 국악'이 정말로 새로우려면 이 정도 쯤은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국악의 정의를 어디까지 허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음악 스타일을 국악으로 분류하고 말고가 결정되고, 또 그 결정에 따라 아예 국악이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25현 가야금 줄을 타고 또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음을 따라 손가락을 퉁기다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역시, 가야금은 손가락이 바빠야 제맛이다. 양손이 같이 놀면 더 좋고!


  결론은, 얘는 맞는 시를 못 찾겠다. 웬만한 현대시는, 그러니까 수능에 자주 나와서 내가 가르치는 현대시는 다들 암울한 분위기로 드글드글 차 있어서 이런 신나는 분위기, 적응 안 된다.


<The Chaser>_오감도(이상)


오감도 烏瞰圖 (시제1호 詩第一號)


13인十三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第一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좃소.


  첫 음과 마주친 그 순간부터 이 음악은 '오감도'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자주 쓰는 언어 교재 '오감도' 말고 이상의 시 오감도. 처음의 긴장감부터 타다다다닥, 빈 골목을 울리고 산산히 부서져 사라지는 연이은 발소리, 느닷없이 찾아온 정적을 채우는 안개같은 두려움, 붉게 달아오른 폐를 가득 뱉아내는 짙은 한숨에 복잡하게 얽히는 날카로운 으름장, 갑자기 길을 일어선 막다른 골목에 질겁하듯 멈춰선 다급한 걸음까지. 어두운 저녁 찬 공기를 찢는 피리 소리와 끼릉끼릉 밤의 적막을 애도하는 해금 소리가 섣부른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것이다. 아우, 살 떨려 죽겠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점점 더 커지는, 벽을 따라 타닥타닥 달려 자신을 좇는 짙은 초록의 그림자, 신새벽 달이 파르르 떨 때마다 점점 더해가는 불안감, 그리고 숨 넘어가는 근원 없는 공포. 골목길을 내달리는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 내달리는 'The Chaser'의 발걸음도 점점 더 빨라진다. The Chaser, 도대체 누구에게 그다지도 쫓겨야 했던 것일까?


<흐노니>_사미인곡(정철)


하루도 열두 떄 한 달도 셜흔 날, 져근덧 생각 마라 이 시름 닛쟈 하니,
마음의 맺혀 이셔 골슈(骨髓)의 꼐텨시니, 편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데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세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라셔도 내님 조차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에서 발췌)


  '가시리' 같기도 하고, '서경별곡' 같기도 하고, '진달래꽃' 같기도 하고,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게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인가 싶기도 하고....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 동경하다'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제목인 '흐노니'는 단박에, 가장 전통적인 '이별에 대한 여성의 정한'을 연상시켰다. 이건 뭔가 진부하다. 어설픈 편곡도 아니고. 이별을 거부하는 몸짓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축원과 함께 끝끝내 임을 보내드리는 순종적인 태도에서도, 그리고는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도 뭍어나는 것은 익숙함 뿐이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늬 님이 오리마는
지는 닙 부는 바람에 행혀 긘가 하노라.
(서경덕)


창 밧기 어룬어룬하거늘 님만 넉여 펄쩍 뛰여 뚝 나셔보니
님은 아니 오고 으스름 달빛이 녈구름 날 속여고나.
마초아 밤일세만졍 행여 낫이런들 남 우일 번하여라.
(작자 미상)


심지어 '행여 이제나 올까 행여 저제나 올까 / 문소리에 달려 나가면 그저 바람의 장난뿐' 하는 가사마저 비슷한 시조 대여섯 개는 기억나게 한다.

  조금은 모순적이게도,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순 우리말 제목과는 반대로 새로움이라곤 개미 눈꼽만큼도 없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가사는 둘째 치더라도 노래도, 멜로디도 타이틀곡으로 쓰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다. 국악기 중에서 멜로디 잡기가 가장 쉬운 악기가 가야금인 만큼 가야금으로 기본 음을 잡았는데, 문제는 가야금 소리는 맑고 청아한 맛이 있어 따로 떼어 듣기엔 좋지만 대신 소리가 비교적 작고, 또 울림이 많아 노래를 곁들일 경우 음이 그대로 노래에 묻혀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야금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흐노니' 역시 아무리 오케스트라처럼 다른 악기들과 함께 음을 맞춘다고 해도 고질적인 단점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반주와 노래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가야금 소리와 함께 맞춰 가기에는 보컬의 목소리가 너무 튄달까? 원래 한 번 밑보이면 밑도 끝도 없다고, 리뷰를 하기 위해 지금도 계속해서 듣고 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리움이 깊어서>_다시 밝은 날에(춘향의 말 2)(서정주)


다시 밝은 날에(춘향의 말 2)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애기 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떄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쏘내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적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 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 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눈을 감고 곡을 들으면 '다시 밝은 날에'가 단박에 떠오른다. 도라지 꽃이 되어 피어나는 춘향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꼭 이러하리라. 굽이굽이 끊어지는 해금 소리가 창자를 끊어내는 소리마냥 애절하다. 서정주가 암만 친일 시인이고, 유신 체제에 협력하는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상당히 부정적인 역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서정주만큼 적절하게 풀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하나의 시어 안에 백만일의 서러운 밤을 하얗게 시새울 한을 담아내고 나면 짙은 그리움은 안으로, 안으로 점점 더 깊어진다. '다시 밝은 날에'가 고도로 절제된 시어를 통해 춘향의 한을 꾹꾹, 눌러담는다면 '그리움이 깊어서'는 그 한을 안에서부터 홀홀 풀어낸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수천만 마리의 노고지리 떼를 닮아 사랑의 한을 화르륵 승화시키는 춘향의 그리움을, 그리고 그 그리움을 쓸어내리는 한숨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뱉아내는 것이다. 깊은 그리움이 남긴 상처 위에 보라빛 꽃을 틔워내는 춘향의 굽이치는 마음을 닮은 음악이 참 마음에 든다.


<Love Letter>_또 기다리는 편지(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Love Letter를 두 가지로 종류를 나누어 본다면 보낼 수 있는 것과 보낼 수 없는 것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보내질 수 있는 것과 보내질 수 없는 것. 편지는 받는 사람과 내용이 명확하기 때문에 모든 글쓰기의 기초가 된다고, 내 피같은 8만원을 훌렁 날려버린 글쓰기 특강에서 강사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이었다. 꼭 글쓰기 연습에서 갖는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모든 편지는 제 나름의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보내지지 못하는 쪽이 더 가치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편지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 하지 못한 말의 무게와 전하지 못할 마음의 애틋함까지 모두 담고 있으니까. Love Letter의 본질적인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유이겠지만, 그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를 좋아한다. 기다림을 차라리 행복으로 삼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영영 보내지지 못할 편지.


  'MIJI'의 'Love Letter'는 편지의 내용 자체보다는 오늘도 지속되는 그 끝없을 기다림을 연상시킨다. 석양이 듣는 섬 기슭에 앉아 읽힐 수 없는 편지를 쓰는 기다림의 행복, 기다림을 기다리는 마음의 잔잔한 물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해금의 활을 따라 고요를 스치는 아득한 심장의 고동에 그만 아뜩해져버려 보내지지 못할 love letter를 쓰고 싶어진다.


<이별애(崖)>
  음...?! 제목이 독특하다. 모르고 지나쳤는데 방금 보니 '애(崖)'자가 '낭떠러지 애'자이다. 그런데 영어로 달려있는 부제가 My f
arewell comfort이면, 저는 이 '崖'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국악 그룹'이라는 타이틀만 떼고 본다면, 음악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타이틀을 다시 달아주는 순간, 다시 한 번, 'MIJI'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이별애(崖)'의 경우 '흐노니'보다 정체성의 혼란이 조금 더 심각해서 가만 듣고 있으면 '이건 뭐지?'라는 의미를 함축한 물음표가 마구마구 찍힌다. 노래소리와 드럼소리, 그리고 기타소리에 묻혀 아래에서 반주를 해주고 있는 국악기의 특색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래가 판소리 버젼인 것도 아니고. 물론, 타이틀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첫 앨범인데, 넘쳐나는 다른 걸그룹들과 차별화되는 점으로 들고나온 것이 '국악'이라는 것인데 어느 정도는 "국악"의 타이틀을 고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목 끝까지 것이다. 에이...


  마지막 부분에서 가야금 하신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손가락 꼬여서 연습 무지 열심히 하셨겠습니다. 나도 25현 가야금 어느 정도 배워봤지만, 손가락 순서가 상상도 안 간다.


<초원의 바람>_도중(途中)(김시습)


도중(途中)


貊國初飛雪     맥의 나라 이 땅에 첫눈이 날리니,
春城木葉疏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해지네.
秋深村有酒     가을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客久食無魚     객창에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보겠네.
山遠天垂野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웠고,
江遙地接虛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征馬政躊躇     나그네 발걸음 가는 길 머뭇거리네.


  <어거스트 러쉬(August Rush)>의 첫 장면에 나오는 풀밭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아이의 지휘에 맞춰 휘이,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따라 넘실대는 초록빛 물결은 나처럼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라도 짙은 초여름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최고의 음악으로 들리게 만든다. 김삿갓으로 더 유명한 김시습의 한시(漢詩)를 읽고나면 금빛으로 가득찬 텅 빈 가을 초원 한가운데 외따로 선 나그네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 아니면 황금가지에서 나온 <반지의 제왕> 표지에서, 초원을 헤치고 걷는 간달프의 모습을 그린 삽화라도.


  '초원의 바람'을 처음 들었을 때 봄빛을 가득 실은 바람에 생동하는 초원보다는 카키색으로 죽어버린 풀밭을 신나개 내달리는 짓궂은 바람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조선시대의 운문문학' 교재에 그려둔 그림 때문일 것이다. 아득히 보이는 산,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는 강, 붉게 뜬 노을, 노을을 가리는 기러기 한마리, 그리고 삿갓 쓰고 지팡이 짚은 나그네 한 명. 잠와 죽겠던 송컴의 수업시간에 끼적인 낙서였지만 제법 구색을 갖춰 색칠까지 했었다. 수업 내용은 두고 꼭 이런 것만 생각나더라. 어쨌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건데, '초원의 바람'이 연주하는 바람은 내가 그린 그림에 꼭 어울리는 바람이었다. 바람(hope)을 닮은 바람(wind).


  가을 초원을 바라보고 섰는 나그네의 바람을 담아 부는 바람에 하얗게 회오리치는 풀밭을 닮아 하늘이 춤춘다.


<Vivid Rainbow>_바다와 나비(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고백하건데, 제목과 음악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리고 음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개개인의 느낌이 모두 다른 법이지만서도 'Vivid Rainbow'는 처음 들었을 때 제목과 가장 매치가 되지 않는 곡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 과외를 끝내고 나와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혼자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불현듯 마음을 스치는 그림 하나가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5권, <오즈로 가는 길>에서 오즈의 마법사가 오즈마 공주의 생일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비누방울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 그림!


Vivid Rainbow. 움직일 때마다 수만가지의 색으로 아롱지는 비눗방울이야말로, 정말로 살아있는, 생생한 무지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비눗방울 안에서 밖을 내다볼 사람들을 생각하자 낭만적인 꿈에 잠겨 세상을 바라보는 김기림의 흰나비가 떠올랐던 것은,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몽글몽글, 비눗방울 안에서 바다를 청(靑)무우밭인 줄로만 알고 신이 난 흰나비처럼, 'Vivid Rainbow'도 제 곡조를 못 이길 때까지, 비눗방울의 순간적인 반짝임으로 세상의 가락을 읊조린다. 하지만 그 나비가 곧 차가운 바닷물에 날개를 적시게 되듯 맑고 탱탱한 비눗방울의 반짝임의 어딘가에서 정체 모를 불안감이 반짝인다. 어쩌면 빵, 하고 터치는 비눗방울처럼 곡이 급작스레 끝이 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곡은 분명 밝은데,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것은 비눗방울이 터지고 어린 흰나비가 세상의 해저와도 같은 차가운 진실에 경악하게 될 순간을 염려하기 때문일 것임을 믿는다.


<Romantic Tango>_추천사(鞦韆詞)


추천사(鞦韆詞)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그네 끝에 매달린 춘향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좌절감이었고 좌절감을 뛰어넘는 까마득한 두려움이었다. 깃대 끝에 걸려 소리없이 아우성치는 깃발의 슬픔도 춘향의 슬픔만큼 차갑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Romantic Tango'는 세차게 구르는 춘향의 발 아래로 땅은 멀어지고 땅에서 멀어진만큼 하늘에 가까워지지만 훌쩍 몸을 날려 새파란 단옷날의 하늘에 빠질 수는 없는 춘향의 마음을, 공허함에 발을 맞춰 춤을 추는 춘향의 마음을, 그리고 끝에서도 끝을 찾지 못한 춘향의 마음을 닮아있었다. 대금 소리가 향단이의 손 끝에서 하늘의 끝으로 춘향을 밀어 올리는 그네줄의 휘청거림으로 들린다면, 나의 마음은 이미 춘향인걸까?

  언젠가 꼭 한 번 대금을 배워보고 싶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인 대금의 음색에 배우지 못한 것이 갈수록 아쉽다.


<Valediction>_불일암인운스님에게(이달)


불일암인운스님에게


寺在白雲中     절집이 흰 구름에 묻혀 있기에,
白雲僧不掃     흰 구름을 스님은 쓸지를 않아.
客來門始開     바깥 손이 와서야 문 열어 보니,
萬壑松花老     온 산의 송화는 하마 쇠었네.


  제목인 'Valediction'은 고별사, 혹은 작별을 뜻하지만 어째서 나는 작별의 정한보다는 깊은 산 속에 박혀서 속세와 단절된 채 영원을 사는 작달막한 노승의 이미지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피리일까, 소금일까, 생황일까,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는 숨결은 구름을 빚어 산을 두르고, 낮게 울리는 첼로(!)의 떨림에 세상을 잊고 사는 스님의 입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맺힌다. 스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이별했으되 그 이별은 참된 이별은 아닌지라 다시 모든 것으로 되돌아가 이어질 것이다. 정적만이 감싸고 도는 산중의 고요함 속에서 '작별'이란 단어의 울림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약한 재즈풍에 피아노, 기타, 드럼, 첼로까지 서양악기들이 대거 등용(!)되었지만 약간은 혼탁한 듯 하면서도 찌르는 듯 날카로운 데가 있는 저 정체모를 국악기와 썩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이 밤에, 새삼스레 깜짝 놀란다.


<Silver Sky>_섬(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냥, 말 그대로 그냥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Silver Sky'가 굳이 '섬'과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냥'이라는 한 마디 말이 아니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줄을 흔드는 굵은 농현이 매력적인, 썩 밝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독한 시를 연상하게 된 데에는 분명 아무 이유도 없거나, 너무 많은 이유가 있음을 '그냥'이란 단어 하나에 담아낸다.


  소녀의 수줍은 발랄함, 나비를 좇는 아이의 까불거리는 발걸음, 갓난아이의 무지개빛 꿈, 함께 노년을 맞는 부부의 여유, 회오리바람을 타고 도는 젊은 날의 격정, 어미의 품에서 뒹구는 아이의 안도감. 가야금의 끝과 끝을 잇는 손가락의 떨림으로 하늘이 열리면 그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삶이 고독한 섬으로 우뚝하니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섬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을 것임을, 절대로 혼자서 파도를 맞아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있다는 듯 은빛 하늘을 타고 흐르는 음악은 생명력으로 가득 빛난다. 단 두 줄로 이루어진 시가 이렇게 거대해질 수 있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밤의 물살을 가르고 빠르게 헤엄치는 음악 덕분일 것이다. 가만 듣고 있으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굉장히 중요한 여담을 하나 덧붙이자면, 가야금 파트 배우고 싶다!


<군밤타령>

  학교 음악 시간에도, 가야금을 배울 때에도, 단소를 배울 때에도 '군밤타령'은 민요 치고도 짧고 흥겨워 배우기 좋은 노래였다.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군밤타령을 배우게 되었는데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그 때는 기교라고는 하나도 넣지 않은 단순한 곡이었지만 무언가 내가 아는 노래를 연주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 아니면 희열감, 혹은 뿌듯함은 어린 가야금 초짜를 구름 위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군밤타령을 하고 난 뒤엔 '반달'이었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배웠더랬다.) 

  'MIJI'의 '군밤타령'은 기초가 끝나고 민요 파트로 넘어가서 배운 '군밤타령' 두 번째 버젼으로 열린다. 가야금, 실같은 비상, 가야금,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리떼, 상승, 소금?, 피리?, 해금?, 가야금 둥둥둥, 꿈을 타고 도는 상승, 가야금, 쿵쿵, 관악기 단체로 삘릴리, 날아오르는 피아노, 정체, 북 둥둥. 곡은 끝날 듯 이어지며 점점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앨범이 닫히면서 아이팟은 툭,하며 침묵하지만 신기하게도 음악이 계속되어야할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처음같은 끝, 끝나지 않은 끝, 조금은 찝찝한 끝.

  '군밤타령'은 익숙한 민요를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재구성해내었다는 점에서는 귀에도 착착 감기고 좋았지만 그런만큼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좀 적당히 들어갔으면 좋았을텐데 촐싹맞게 방정떠는 저 드럼 소리를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드럼이 한 번 쿵, 할 때마다 철로 된 손가락이 심장을 낚아채 발걸음이 턱, 턱, 늦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드럼이 빠진다고 생각해도 곡이 웃겨지겠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지 싶다.

  곡이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군밤타령'의 뒤로 졸졸졸 이야기가 따라붙을 것만 같다.

[Epilogue]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 같지만 사실은 불과 어제였던 날에 친구와 나눴던 네이트온 대화에서처럼, 영화가 되었건, 책이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리뷰를 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쓰다보면 꼭 삼천포도 아니고 삼만포로 빠져서는 쓸데없는 헛소리로 끝나고 말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무언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밖으로 뽑아 늘어놓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책임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책임까지도 포함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 나의 판단, 혹은 나의 생각을 인위적인 언어로 박아 객관화 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머리 속에서 어지러이 춤추는 것들에 대해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뷰라고 하기에도 참 뭣한 감상문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글들을 쓸 때마다, 나의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릴까봐, 나의 부족한 생각이 혹여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바늘 하나로 콕 찌른 점만큼의 영향이라도 끼치게 될까봐 무서워 죽겠는 것이다.

  안 그러고 싶은데, 'MIJI'의 'The Challenge'에 대해서도 글을 나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음악을 듣다가 떠오른 시 한 편, 소소한 생각들, 눈 앞에서 까불거리는 총천연색 이미지들,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내린 애들 장난같은 평가들. 평소에 하지 않던 짓까지 해가며 또다시 벼락치기 근성을 발휘했지만 처음 쓰는 음반 리뷰에 긴장감은 자꾸만 나의 머리를 조인다. 빠짝바짝.

평소에 나는 절대로 컴퓨터로 음악을 듣는 법이 없는데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다가는 아이팟이 터지지 싶었다.
리뷰를 쓰는 동안에만 들은 'MIJI'의 'The Challenge'.
귀가 아파서 이어폰을 계속 끼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 짧은 글 몇 줄을 끼적이는데 도대체 몇 시간이 걸린 거지...?!

  길에서 아이팟으로 들은 x번을 더하면, 그래도 음반을 리핑하고 난 뒤로는 내내 'The Challenge'를 들었던 셈이다. Jason Mraz의 'We Sing, We Dance, We Steal Things' 외도 한 번 한 걸 빼면. 이 집착, 누구 칭찬해 주는 사람 없나 몰라. 무튼, 귀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주구장창 들어제낀 'The Challenge'는 전반적으로 꽤 괜찮은 음악이었다. 1집이라 그런 것인지, 혹은 1집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해 보느라 12개의 곡이 각각 따로 느는 듯한 중구난방한 느끼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처럼 국악기를 배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간만에 가야금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음악이었달까. 감정과 기억의 옆구리를 푹푹 찌르는 시간인 것 같아 마냥 기분이 좋다. 다만 '국악계의 걸그룹'이라는 어설픈 타이틀은 떼는 것이 어떠할는지.

  오늘, 과외가 일찍 끝난다면 집에 와서 간만에 월산대군의 시조를 연상시키는 진양조부터 달리는 말을 몰아치는 듯한 휘모리까지, 손가락에 물집 잡힐 때까지 뜯어봐야겠다.

덧 : 다 쓰고 한 번도 다시 안 읽어봤고, 나의 직업병은 어쩔 수 없으며, 벼락치기 근성 역시 어쩔 수 없다.


렛츠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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