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신의 손 - 로댕특별전_조각(sculpture)들의 조각(piece)난 미술관 Contemplations(culture)

  나는 미술관이 너무너무 좋다. 박물관도 좋지만 미술관은 배경지식에 대한 무언의 압박에 등을 떠밀리는 것만 같은 왠지 모를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운 기분이라 더 마음에 든다. 나른하니 포근해지는 오래된 먼지 냄새. 한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미술 전시회에 다녔던 것 같은데(남들 영화관 가는 만큼 미술관에 들렀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지갑에 든 돈이 없다는 얼토당토 않은 핑계로 언제부터인가 그 정겨운 냄새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말았다. 따끔따끔 반짝이는 과거의 시간을 품은 먼지 냄새, 해를 묵은 물감 냄새, 목소리를 낮춰 자기들끼리 속살대는 그림들의 이야기 냄새, 냄새의 조각, 조각, 조각, 그리고 조각. 그 조각을 사랑했더랬다.

  난 딱히 조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조각이라는 것을 내가 직접 해본 적도 없거니와 주변에서 조각 예술을 접할 기회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학교 건물 앞마다 세워져 있는 학자들의 흉상 말고) 책에서 본 그림들, 혹은 아예 현대적인 추상 조각들이 전부. 조각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 완전히 미지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지'라는 단어에는 분명, '두려움'의 의미가 어느 정도 섞여 있음을, 나는 깊숙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로댕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내가 처음 보인 반응은 '뭐 별 거 있겠어?'였다. 그 대단한 무지와 대단한 미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 오는 작품들에는 (꼭 서울시립미술관이 아니더라도-사실 이건 서울시립미술관의 고질적인 문제점인데 기획 자체는 참 괜찮아도 실제로 갖다 놓는 작품은 상당히 부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사실은 '언제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건 순전히 주관적인 평가인 만큼 객관적인 단어는 삼갈 필요를 느낀다.) '시립'임에도 결코 싸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갔다 나오면 거의 언제나 사기 당한 느낌이 들곤 한다.) 정말로 유명한 작품들-그러니까 사람들이 보통 보기를 기대하는 작품들-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변변찮은 작품들만 몇 점 갖다 놨으리라고 으레 짐작해버린 것이다. 참 얼마나한 착각이고, 얼마나한 무례이며, 또 얼마나한 오만인지. GG이 어제 말한 '자기 안의 타자'가 이런 뜻이였을까? 나는 내심 그 방자한 오만으로 가득차 '나중에 파리에 있는 로댕미술관에 가서 제대로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나는 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로댕전시회에 가자고 친구들을 꼬셔내고 있는 것이었다. 존재의 가장 표면적인 모순. 메롱.

  학회 사람들이랑 가기로 했는데 파토나고, GG은 자기는 조각을 몰라서 됐다고 하고, 오리는 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나랑 시간이 안 맞고, 병아리는 자기 약속 있다고 다음에 가자고 하고....하다가 약속 취소됐다고 문자가 왔다. 오예, 딱 걸렸어! GG이랑 루킹래징에서 와인치즈케익을 먹다가 주4파라 좀 전에 일어났다는 병아리를 인천에서부터 서울까지 소환했다.(뭔가 근사한 주문이라도 외웠으면 좋으련만.) 병아리가 도착한 것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아래에 있는 한글기념관인지 어디에 앉아 Rimbaud를 인용해가며 GG이랑 '자기 안의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1), 시청역 1번출구 앞에서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렇게 외로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한 모순처럼 느껴졌다.), 배터리가 나가서 핸드폰이 꺼진 병아리를 찾아 시청역 지하와 서울시립미술관 사이를 두 번 쯤 왕복하고, 결국은 지쳐서 서울시립미술관 층계참에 앉아 또다시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을 때였다. 4시 쯤 되었을까. 병아리 뒤로는 늦은 오후의 반짝이는 해 그림자가 발걸음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로댕전. 알고 있는 로댕의 작품이라고는 '지옥의 문'과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청동시대'가 전부였음에도 못된 오만, 무지한 오만으로 가득 차있는 나의 눈은 과연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내심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데, 그 질문은 순수한 질문인 동시에 나의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미술작품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라지만,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나의 이성은 언제나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alea iacta est.(*2)    
alea iacta est.
무려 12000원짜리 티켓.
프랑스 문화원 회원증이 있으면 할인을 해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기대는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지해서 좋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철저하게 기록을 남긴다는 것.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익숙한 작가의 익숙한 작품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지나더라도 최초의 느낌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지만 모르는 작품 투성이라면 별 수 없다. 앞에서, 뒤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전체에서, 부분에서, 그리고 다시 전체에서 작품 하나하나를 정성을 들여 꼼꼼히 훑고는 마치 크로키를 하는 기분으로 순간적이고 지속적인 인상을 종이에 재빠르게 옮겨 적는다.('프랑스현대시' 중간고사 예비 답안 개요 초안 뒷면을 좀 활용했다.)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그 중간쯤 되는 어딘가의 느낌. 뭔가 매끄러운 글로 정리하고 싶기는 하지만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단어 몇 개만으로 (내가 지금부터 잡아내려는 문장이 장황하든 간단하든 간에) 문장을 잡아낼 수 없어 그냥 메모를 통째로 여기에 옮긴다.

* 신의 손 : 커다란 손에 들린 대리석 덩어리에서 사람이 탄생한다. 국수를 뽑아내는 느낌일까, 아니면 찰흙으로 빚어내는 느낌일까? 기독교의 신은 아담을 흙으로 빚어냈다는데, 로댕은 돌로 최초의 인간을 조각해내는 신의 손을 돌로 조각했다면 대리석은 차가울까, 뜨거울까?
* 청동시대 : 근육의 결, 발가락, 손톱, 귀... 완전 리얼하다. 처음 만들었을 때 너무 생생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주물을 뜬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는데, 사진을 보니 실제 모델의 몸은 저렇게 잘 빠지지 않았다.
* 아담 : 표정이 살아있다. 고통에 찬 표정이든, 희열에 찬 표정이든, 어쨌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중요한 거다. '이브'는 울퉁불퉁하던데, 얘는 왜 이렇게 매끄럽지?
* 생각하는 사람 : 거칠게 울룩불룩하는 모양새가 꼭 고흐 그림의 소용돌이를 연상시킨다. 저 자세를 취하고는 절대로 편하게 앉아서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냥 패스. 모두들 '생각하는 사람'이 대단한 작품이라고들 하지만 내 생각에 개별 작품으로서의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작품 전체(*3)의 맥락에서 봐야만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손에 잡을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의 공허한 눈은 자신의 발 아래 지옥의 문을 뒀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 지옥의 문 : 사람들이 조각으로 녹아들 듯 튀어나온다. 녹아들 때에는 퍽 부드럽게 녹아들지만 튀어나올 때에는 심장이 철렁할만큼 급작스레 튀어나와 지옥의 순간이 현실의 영원으로 굳어진 듯한 인상이다. 뒤틀린 근육과 긴장된 표정이 내어지르는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 추락하는 사람 : 지옥의 문 위에서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지만 추락의 끝을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다. 결과를 느끼는 것과(그러니까, 직감하는 것과 예감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느낌.)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피에르 드 비쌍 : 표정이 너무 슬프다. 이미 미라보 다리 아래로 흘러간 시간과, 시간만큼이나 멀어진 공간을 넘어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껴지는 표정. 방금 지나간 할머니는 "썩은 표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양 미간에 굵게 자리잡은 주름은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푹푹, 함부로 판 듯한 칼자국과 부드러운 곡선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병아리도 피에르 드 비쌍이 제일 마음에 든댔다.) 
* 칼레의 시민 : 분명, 고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처럼 튜닉의 주름이 실제감 있지는 않지만 빗나간 딱딱함이 오히려 진지한 무게감을 준다. 조각에 있어 질감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굴곡진 강인한 육체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음은 무언의 대상을 향한 반항인 걸까?
*연인의 손(석고) : 사실적이기보단 관념적이다.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주안점을 둔 듯하다. 훨씬 작은 여인의 손을 그러잡으려는 듯한 제스처는 마치 애타는 순간을 멈춰놓은 느낌이다. 하얗게 차가운 석고이지만 그 석고 아래로는 붉은 피가 흐를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든다.
* 안드로메다 : 부드러운 곡선을 흘리며 떨어지는 여인의 몸과 울퉁불퉁한 돌의 질감을 살린 하단부가 대칭을 이루며 어긋난다. 하지만 그 어긋남은 마구잡이로 구겨진 하단부에서 솟아오르는 부드러움이 인위적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돌 속에 내재되어있던 것을(혹은 숨어있던 것을) 그저 자연스럽게 끄집어낸 것이라는 느낌을 완성한다. 
* 입맞춤 : <신곡>에도 나왔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금지된 입맞춤을 잡아낸 작품이라지만 에로스와 프시케를 인상시킨다. 개인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봤던 카노바의 '에로스의 입맞춤으로 소생한 프시케'라는 조각을 굉장히 좋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는 두 연인의 표정이 참 아리송하다. 수심에 찬 표정인 걸까, 아니면 무표정의 표정인 걸까?(무표정의 표정이 표정일 수는 있는 걸까?) 둘 사이에 뭉그러져 들어간 꽉 찬 공간은 밖에서는 차고 안으로는 깊어가는 운명의 침묵인 것만 같다.
* 아상블라주 - <여인의 토르소>를 들고 있는 로댕의 손을 주조 :  주조한 작품인만큼 손톱과 손가락의 미세한 주름까지 모두 살아있지만 죽은 손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 고목나무 : 나무가 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리스 신화에 꽤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였는데, 뭐였지? 이 사람은 왜 나무가, 그것도 다 늙어 생명이 다한 고목나무가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 달걀 위의 춤 G : 와우! 아슬아슬, 불안불안하면서도 균형을 잡은 모습이 마음에 든다. 분명 고정된 조각인데도 달걀 위에 한 다리로 선 무희들의 자그마한 몸이 흔들흔들 까불랑거리는 것 같아보인다.
* 새벽 : 형체가 없는 새벽에 기대는, 위로받을 데 없는 고독의 향기를 물씬 풍겨낸다. 반드시 위로를 받아야 할 것도, 용서를 받아야 할 것도 세상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지만 '새벽'의 고독은 청동 속에서 살아 숨쉬는, 그러니까 실재하는 실제이다.
* 아상블라주 연작 : 어울리지 않는 두 조각(sculpture)의 조각(piece)들을 마구잡이로 우그려넣은 '쌍'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가장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부조리가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카미유 클로델's 로댕의 초상 : 찰흙으로 대충 주물러 반죽한 듯하지만(특히 수염이) 그 안에서 마치 광기와도 같은 세밀한 정성이 터져나온다.
* 카미유 클로델's 왈츠 : 얼핏 보아서는 로댕의 작품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여러 번 돌아보니 느낌이 조금 다르다. 활짝 펼쳐진 치마가 기단으로 곧바로 연결되는데, 두 사람의 세계가 마치 드레스 자락 내로 한정되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맞잡은 두 손에서 왠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진다. 카미유 클로델은 신데렐라였던 것일까?
* 카미유 클로델's 애원하는 여인 : 앞으로 내민 여인의 손이 끝나는 곳, 비어있는 상대가 애절함을 더한다. 모름지기 공간은 차 있을 때보다 비어있을 때 더 서러운 법이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눈에는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표가 수없이 떠다닌다.
* 회복 : 이불 속에 숨어서 빼꼼, 고개만 내민 어린 아이같다. 칼 끝에서 생겨나는 조각의 모호한 경계 속에 갇힌 깨질 듯 불안한 시선은 분명, 회복이 아니라 더 짙은 두려움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자의 시선이다.
* 춤동작 연작 : 춤 동작만 있고 생명력은 없다. 그냥 정지된 그림을 닮아서, 꼭 조각으로 크로키를 한 느낌이다. 해설에서는 로댕에 무용수에게 별달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라지만, 정말 그럴까?
* 사람과 그의 생각 : 갈라테이아를 조각하는 피그말리온의 마음이 저러했을까? 덩어리가 구체적 인물이 되는 것일까, 구체적인 인물이 덩어리가 되는 것일까?
*우골리노 : 아비와 아들이라는데, 혈연의 사랑인지, 원죄적 갈등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발자크 기념비 : 맙소사, 발자크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배 나온 것까지 똑같다. 근데 발자크는 로댕이 자기를 그렇게 민망스러운 자세의 누드로도 조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 빅토르 위고 기념비 : 빅토르 위고를 굉장히 대단한 인물로 형상화했다. 실제로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빅토르 위고의 문학적 성과는 인정하지만 그 성과는 순수하게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실제로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분명 여기저기서 들은 조각난 수업 때문일 것이다. 거친 선은 위고의 문장을 연상시키지도 않고, 위고의 철학을 연상시키지도 않는데, 로댕이 청동으로 된 위고에게 불어넣고 싶었던 것은 단지 그 영향력 뿐인 것일까? 뒤에서 위고를 받치고 있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다. 아델일까?

  로댕의 작품은 항상 틀에서 부드럽게 시작해 다시 부드럽게 녹아들어갔다. 모호한 경계--평면은 공간이 되고, 공간은 다시 평면이 되었으며, 생명은 비생명이, (죽음은 아닌) 비생명은 다시 생명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순환 속에서 잊혀질 순간은 비로소 영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었다.

  조각은 사실적이다. 어떤 느낌으로 살결을 새기느냐에 따라 대단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어쨌건 조각은 3차원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작업인만큼 평면 속으로 깊어지는 회화 작품에 비해 훨씬 더 사실적이다. 그리고 분명, 제 1 전시실의 입구에서 내가 로댕의 조각 작품에 감탄한 이유도 바로 그 사실성에 있을 것이었다. '청동시대'를 비난했던 1877년의 파리 사람들처럼. 처음에는 로댕의 작품들은 완전한 사실 그 자체만을 재현했다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각은 결코 중립적인 예술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지 울퉁불퉁 거친 선을 따라 흔들리는 작품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금방이라도 전시선을 훌쩍 넘어 전시실 밖으로 걸어나갈 것 같을만큼 정말로 사실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작품에서조차 상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내가 인식하는 '나'들의 합으로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자기 안의 타자', 혹은 '내 안의 타자'가 마치 로댕의 청동 조각 안에서도 스스로 기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미술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여섯시 반이 훌쩍 넘어있었다. 왠지 두 피안을 잇는 문을 열고 나오니 낯선 세계에 뿅, 하고 떨어져버린 기분, 그러니까 난 분명 금요일 오후를 살고 있었는데, 금요일의 그 오후가 2010년의 오후가 아닌, 좀 전으로부터 100년 쯤 지난 2110년의 오후가 된 기분이었다. 자그마한 현기증. 아마 그 현기증은 커다란 만족의 다른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술관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미술관에서만 맡을 수 있는 먼지와, 시간과, 자유와, 이야기의 살가운 냄새를 참 좋아한다. 시간이 멈춰선 미술관에서 조각(piece)은 언제나 이어지듯 끊어지며, 다음 순간, 끊어지듯 이어진다. 나는 조각(sculpture)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삶의 모든 측면들이 조각난 미술관에서라면 조각에 대한 무지 쯤은 쉽게 용서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1) 내 생각이지만 세종대왕 아래 있는 한글기념관은 방공호가 분명하다. GG은 전쟁 나면 북한이 제일 먼저 광화문에 폭탄을 떨어뜨릴 거라며 여기가 제일 취약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 아래 뚫어 놓은 공간을 감싸고 있는 벽이 한 30cm쯤 되는 강철로 이루어져 있을지는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2)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남긴 말. 하지만 카이사르가 정말로 저렇게 얘기했을까? 2000년도 더 전에 지구 상에 살았던 사람이 무슨 말인가를 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우스운 말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그렇게 말을 한 건지, 기록만 그렇게 한 건지 아무도 확인해줄 수 없는데.

*3)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의 일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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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05/09 23: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orstalansag_i 2010/05/09 23:12 #

    동감이에요 :) 예술의 가치는 바로 그 이면의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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