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꿈, 노란 우산 Pour Mon Papillon

  얼마 전부터 꿈에서, 자꾸만 낮에 있던 어떤 장소로 돌아가곤 한다. 강의실로, 연구실로, 지하철 안으로, 버스 안으로. 그리고 꿈 안에서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일상적이기에, 오히려 그 사실이 꿈 속에서, 꿈 속에서만 가능한 허무맹랑한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강의실에서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데 수업을 끝마치는 벨이 울린다. 어라,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교에서 벨이 울릴 리가 없는데? 몸을 틀어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 알람을 끄고 나니 내가 잠을 잤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신기할만큼 큰 소리를 내며 비를 퍼붓는 창 밖은 꿈 속보다 더 어둡다. 보라색과 분홍색 펜으로 쓴 깨알같은 글씨가 순식간에 깊은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실제로 깊은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둡고 짙은 빛깔 때문에 당연히 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 온 힘을 다해 떠지기를 거부하는 눈을 비틀어 짜면서 왠지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내내 학교 가기 싫다고 노래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집 밖으로 기어나온 것은 엄마가 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하셔서였다. 한 달에 한 번쯤, 출근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시는 아빠와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하는 딸─. 아빠와 딸은 발가락이 닮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데서도 닮는 것일까? 아빠를 똑 닮은 딸과 딸을 똑 닮은 남편 사이에서 엄마는 오늘도 해결사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의 투덜거림은 계속된다. '힝, 비 오는 날 노트북 들고 학교 가는 게 제일 싫더라.'

  내 노란 우산은, 아이러니하게도 비가 오는 날 보다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 그 색깔이 더 예쁘다. 햇빛이 꽃잎에 반사될 때의 데이지꽃을 닮은 밝은 노랑. 네 번 쯤 접히는 자그마한 우산이다. 한 쪽 팔에는 노트북을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기계적으로 걸어 강의실에 도착한다. 회색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기왕이면 보지 않는 편이 좋다. 강의실 앞까지 왔는데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테니까. 다른 강의실, 다른 교수님, 다른 수업이지만 끊어졌던 어제의 꿈은 절뚝절뚝, 다시 시작한다. 꿈 아니면 현실, 현실 아니면 꿈. 오늘 입고 나온 청자켓의 색깔과 똑같은 파란 잉크를 비워내는 만년필로 미친듯이 필기를 하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만 헷갈리고 만다. 나는 현실 속에 있지만 동시에 꿈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꿈 속에 푹 젖어있지만 동시에 가장 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 뭐가 다른 걸까?

  Réel onirique. Onirique라는 말의 발음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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