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마을>_Take me to the Middle Ages Contemplations(culture)

  저번 주 내 일주일치 예산은 하루에 2500원씩 나오는 교통비를 빼고 15000원이었다. 단 하루뿐이긴 했지만 월요일까지는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하루 지출 0원. 하지만 화요일, 펜 리필심을 사러 학관에 들어선 나는 무시무시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헤이북 도서 할인전'. 맙소사, 생협님,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나의 이성은 '안돼'를 무수히 외치고 있었지만 내 발은 책이라는 좌석에 이끌리는 쇠붙이라도 되는양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매대에 쌓여 있는 책들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의 발은 책 앞에 매여 있었지만 나의 머리만큼은 거기 쌓여 있는 책 중 내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한 권도 없길 바랐다. 어쨌거나 나는 이번 달에 책을 꽤 여러 권 질렀고, 과외는 끊겼으며, 남은 날은 많이 남아서 거지 놀이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열린책들 책을 모아놓은 매대 앞에서 나의 기대는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다. 바윗돌 깨뜨려 돌덩이, 돌덩이 깨뜨려 돌맹이, 돌맹이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랄라라 라라 랄라라, 랄라 라라라 랄라라♬ 머릿속에서 BGM이 마구마구 울린다. 내 눈에 딱 들어온 <13번째 마을>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책이었다. 그래, 거기는 잘못된 위치였다.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을 집어드는 순간, 손 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희열 앞에서는 만일 책을 산다면 남은 일주일을 쫄쫄 굶어야 한다는 위기 의식마저도 모래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속에서의 진행─ 흙에서 나온 자, 흙으로 돌아갈지니. 그리고 나는 관대하다. 새로 산 책이 집까지 오는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함께 가방 속에 들어가있을 다른 책 한 권을 더 구입했고, 결국 난 저번 주 내내 2400원으로 끼니를 해결해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간의 거지 생활을 후회하지 않을만큼 책이 훌륭하다면 정말 보람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맹 사르두의 <13번째 마을>(*1)은 정말로 괜찮은 책이었다.
헤이북 스티커가 붙은 책.

  나는 추리물에 환장한다. <셜록 홈즈>처럼 대놓고 추리물도 좋아하고, <장미의 이름>처럼 안 대놓고 추리물도 좋아한다. 그 말은 아마도 약간의 스릴러적인 요소가 더해진, 머리를 굴려가며 읽어야 하는 책을, 그러니까 가장 원초적인 재미를 제공하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책을 선호한다는 뜻일 것인데 <13번째 마을>이 딱 그런 책이었다. 적당한 긴장감, 매끄러운 문장, 사실적이고 생생한 스토리, 뒷 이야기가 궁금해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절제된 전개, 모든 마법적인 가능성과 미지의 흥미를 허락하는 적절한 배경 선택─ 이렇게 탁월함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은 참으로 간만인지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차곡차곡 차오르는 만족감에 무한히 행복해진다.

  책은 각자 고유한 호흡을 가지고 있다. 천천히, 산책이라도 나온 듯 있는 여유 없는 여유 모조리 부려가며 쉬엄쉬엄 걷는 책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개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거리를 전력질주를 하는 책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뒤에서 힘들어서 헉헉헉. 로맹 사르두의 <13번째 마을>은 그 둘의 중간 어딘가 쯤에 속하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려 숨을 몰아쉬지만 결승점까지 결코 지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뒤로 갈수록 그 호흡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는 책이었다. 드라강의 주교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로메 드 아캥 주교의 과거를 쫓아 바티칸의 음모에 뛰어든 쉬케 보좌신부, 과학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위험천만한 실험을 진행시키고, 그 사실은 은폐하려고 하는 모든 기독교의 심장 바티칸, 모든 일의 원인의 중심에 있는 13번째 마을 외르트루에서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점점 사건의 핵심으로 빠져드는 에노 기 신부의 이야기가 숨가쁘게 교차되는 긴 여정에서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며 중세의 숲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뿅! 하는 타임머신, 그리고 싱크로율 300%. 사람들은 말한다. 영화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 맞는 말도 아니다. 영화는 오로지 제한된 상상력만을 제공한다. 모든 관객이, 영화 감독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상을 똑같이 보고, 똑같이 상상하고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상상력은 자유롭다. 10명의 독자가 읽으면 10개의 세상이, 3000만의 독자가 읽으면 3000만 개의 세상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자신의 것으로 살아있기에 영화가 보여주는 만들어진 상상력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 5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장을 휘리릭 넘기면 내 주변의 시간과 공간은 마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듯 일그러져 나를 살아있는 중세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책의 호흡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독서 토론 프로그램의 진행자 베르나르 피보(*2)는 <13번째 마을>을 "아름다운 여인도, 사랑 이야기도 없다. 스물여덟의 로맹 사르두는 자신의 데뷔작에 얕은 수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중세의 작은 마을에서 재현된 묵시록. 그곳에선 악마가 교회를 조종하고, 사르두는 그 악마를 조종한다. 겁도 없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겁도 없이". 소재의 선택과 전개에 있어 거침이 없었던 이 책에 꼭 맞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겁 없는 뮤즈를 만났기에 이다지도 자신만만하고, 또 대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나는 이 책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던가?

  어려서부터, 나에게 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부모님께서 그렇지 않아도 심한 난시가 더 심해질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책 읽는 걸 좋아해 어딜 가건 한 번 손에 잡은 책은 놓을 생각을 잘 하지 않는지라 차 안에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나에게는 4살짜리 아이가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마시멜로를 입에 넣지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껏 대부분의 경우 엄마아빠의 무시무시한 잔소리와 체벌이 제기능을 퍽 훌륭히 수행했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두운 밤, 도로 위로 하늘거리는 늦은 시간의 마법을 철썩같이 신봉하는 기사 아저씨의 난폭한 운전으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호기심은 교육된 이성과의 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했고 나는 다시 한 번 중세의 숲으로 풍덩 빠져드는 것이었다. 엄마아빠한테는 비밀.

  책이 좋다. 문학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는, 밥을 쫄쫄 굶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약같은 매력이 있다. 비록 배를 곯긴 했지만, 배고픔을 대가로 지불하고 산 책이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다만 한가지, 요한 묵시록과 중세의 기독교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고 읽었으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대만족. Pardonnez-nous nos offenses.(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1) <13번째 마을>이라는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Pardonnez nos offenses(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든다. 보다 미묘하고, 보다 비밀스러우며, 보다 정교하다. 분명 책은 13번째 마을을 둘러싸고 물밑에서 벌어지는 다툼까지 낱낱이 까발리지만 그래도 책 제목은 많은 것을 보여주되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을수록 더 멋있는 법이다.

*2) 프랑스의 잘 나가는 작가들은 모두 이 사람의 프로그램을 거쳤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작품을 써내는 작가보다 작품의 가치를 발견해내는 이 사람이 더 대단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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