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 Après>_쉿, 조용히! Contemplations(culture)

  인간의 삶 뒤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얘기하는 내게 그건 내가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그런 거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인간의 삶 뒤에 있는 무언가는 죽음 이후의 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커다란, 무척이나 커서 이 세상을 꽉 채울 그런 우주적인 어떤 선(先)결정이기도 했다. 나에게 삶이란 언제나 3차원의 세계에 존재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종교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다만, 인간의 오만을 믿지 않을만큼 나이가 든 그 사람의 삶에는 그만큼의 깊이가 있었을 뿐이다. 다른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소설가들은 삶의 끝에서 빛이 시작된다고 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도, 기욤 뮈소(Guillaume Musso)의 소설에서도, 삶의 끝에는 언제나 새하얀 빛이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꽃잎보다도 더 순결한 하얀 죽음─ 죽음이 하얀 이유는 그 너머에 있을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돌아와야하기 때문이었다.

  기욤 뮈소의 소설의 제목이 <Et Après(*1)>인 것 역시 삶 너머에, 그러니까 인생의 종잇장의 반대면을 이루고 있는 죽음 너머에(*2) 있을 피안의 세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정적 피안의 세계에서 돌아온 네이선 델 아미코(Nathan Del Amico)에게  가렛 굿리치(Garrett Goodrich)는 이미 저 우주 어딘가에서 정해져있는 삶의 끝을 보여준다. 하얀 아우라로 찍힌 그 낙인은 저 너머의 세상으로 가는 비행기표이자 우주적인 결정의 증거인 동시에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채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하얀 세상 자체로서 존재한다. Le prix─. 죽음은 하얀만큼 치뤄야 할 댓가는 무겁다.

  영화 'Et Après'는 분명 기욤 뮈소의 <Et Après>를 원작으로 삼았음에도 원작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작품을 이룬다. 다른 이름, 다른 설정. 보통의 경우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원작의 설정을 이만큼이나 바꿔놓는다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 십상이나(*3) 'Et Après'의 경우에는 그 무심한 비판을 빗겨나기에 충분할만큼 그 자체로도 이미 하나의 작품으로 독립한다.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할만큼 훌륭한 홀로서기이다. 아니, '홀로서기'라는 말 자체가 어떤 특정한 의존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칫 뒤섞여 길을 잃기 쉬운 그림펜 대늪지(*4)에서도 늪의 깊은 수렁으로 빠지지 않고 제 길을 찾아낸 영화, 혹은 그럴 수 있을만큼 자존심 세고, 고집 센 프랑스 영화라는 표현이 아마 맞지 않을까 싶다.

  배우들이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나 영어 더빙으로 돌려도 자막이 프랑스어로 뜬다는 사실을 굳이 집고 넘어가지 않더라도(사실은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만큼 가벼운 사안은 아닐 것 같지만. 곧 프랑스에 가야하는데 귀가 뻥 뚫려주지 않아 속이 더 답답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Et Après'에서는 프랑스 영화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요즘 한창 즐겨보고 있는 한 미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CSI나 NCIS 둘 중 하나일텐데 어느 쪽이든 하도 많이 봐서 어디 나오는 것이었는지는 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건 DNA에 새겨져있는 태생적 냄새인 것이다. NOBODY CAN DENY IT. 정적이고, 말은 많은 듯 없고,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헐리웃 영화와는 다르게 앵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하고자 싶어하고, 이것보다 더 특징적일 순 없다. 특징적, 전형적, whatever. 그리고 'Et Après'가 원작과는 별개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9할은 이 영화가 프랑스 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감독이 "Chahiers du Cinéma"에 기고한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이라는 글에서 "작가주의(le cinéma d'auteur)"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후 작가주의는 말 그대로 프랑스 영화의 가장 대표적인 '경향'이 되었다. 1950년대 영화계를 풍미하던 원래적인 의미로건,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다소간 퇴색되고 변질된 의미로건 내로라는 프랑스 영화 감독들은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작가주의의 전통을 고수한다. 감독을 작품의 총체적 책임자로 만드는 이 작가주의 덕분에 'Et Après'의 감독 Gilles Bourdos는 원작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프랑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의 눈이 아닌, 작품을 대하는 작가로서의 감독의 시선인 것이다.

  하릴없는 일요일 아침 시간을 죽이기 위해 보기 시작한 영화 치고는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영화가 시작된다. 제레미의 병실을 들여다보는 케이 박사(원작에서는 가렛 굿리치)의 시선에서, 또는 품에 폴(원작에서는 숀)을 안은 클레어(원작에서는 맬로리. 개인적으로는 맬로리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클레어'는 오드리 니페네거의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 나오는 슬픈 주인공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 트레이시(원작에서는 보니)와 함께 흩날리는 꽃씨 속에 서 있는 네이선의 시선에서. 배경음악보다는 대사로, 대사보다는 시선으로 채워진 앵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더욱 강렬하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郞の夏)'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좋았지만 당황스러우리만치 말이 없는 영화였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말소리가 들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정적과 일상의 소리들이 아닌 다른 인위적인 소리, 그러니까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라치면 오히려 깜짝깜짝 놀랄만큼 대사가 적었다. 중학교 때 일본어 과제였는데, 중학생이 보기에는 심히 재미가 없는 영화였고, 또 구체적인 내용이 생각나지도 않지만 이상하게 영화의 존재만큼은 판화를 새기듯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았다. The power of silence─. 텅 빈 침묵은 이미 자연스레 흘러가는 모든 것을 담고 있기에 대단히 인상적이다. 'Et Après'가 이토록 오래도록 생생하게 시선의 가장자리를 더듬을 수 있는 이유는 '기쿠지로의 여름'처럼 'Et Après' 역시 비어있는 잔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시선으로 꽉 찬 한 쪽 끝과 최소한의 대사로 텅 빈 다른 한 쪽 끝을 더듬어 맞잡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면 어느새 길게 꼬리를 늘어뜨릴 커다란 환상이 완성된다.

  프랑스 영화의 잔잔함을 좋아한다. 모든 프랑스 영화를 잔잔하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겠지만 프랑스 영화의 어떤 한 '경향'으로서의 잔잔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인물도 허락하지 않는 그 평등한 잔잔함은 분명 사람을 기쁘게 할 권리가 있다. 사람을 평온한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메신저는 헐리웃 영화에서라면 요란스러운 통과 의례를 통해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는 특별한 인물이겠지만 프랑스적인 잔잔함을 닮은 영화 'Et Après'에서는 그리고 언제나 곁에 함께 하는 죽음을 타인의 것까지도 품어안을 수 있을 네이선과 닥터 케이는 바람에 춤을 추는 은사시나무의 반짝이는 잎사귀만큼이나 일상적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치뤄져야 할 댓가 앞에서 네이선은 불가능한 미션을 성공시키는 영웅이 되지 않는다. 다만, 댓가로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길을 담담히, 그리고 조용히 받아들일 뿐이다. The show must go on, and the life does go on, in certain silence. 산 그림자의 발치를 적시며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삶도, 인물도, 영화도 모두 그렇게 소리없이 흘러 이른 일요일 아침의 목마른 마음을 적신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빛이 정말로 거기에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강물이 모래를 자신의 안으로 가라앉히며 흐르는 동안 중요하지 않아져버린 것 뿐이다. 기억 속에서 자꾸만 되풀이되는 영화의 장면을 가득 채운 그 황홀한 황금빛만이 중요할 뿐, 묵직한 고요를 구르는 다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1) Afterwards. 그 후에. 한국에서는 <완전한 죽음>으로 번역됐다. 이승재 옮김, 열린책들, 2005년.
*2)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 이론을 기억하는가? 현대 언어학의 할아버지 쯤 되는 Saussure는 언어 기호(signe)를 이루는 signifiant(image acoustique)과 signifié(concept)의 관계를 종잇장에 비유했다. 그는 종이를 자르면 종이의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잘려나가듯 signifiant과 signifié는 결코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삶과 죽음도 이와 같아서 그 누구 앞면만 있거나 뒷면만 있는 종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3) 예컨대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것들- 특히나 5편 불사조 기사단과 6편 혼혈왕자 같은 경우는 좀 심하게 어이가 없었다.(4편은 안 봐서 모르겠으니 패스. OCN에서 5편을 해주는 걸 보면 분명 언젠가 해줬을텐데.) 분량이 워낙 많다보니 한정된 시간 안에 영상화 시키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책을 새로 쓰는 건 좀 아니었다.
*4) A.코난 도일의 소설 <바스커빌 가문의 개>에 등장하는 늪지대.

덧 : 내일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쓰던 걸 마무리짓고 싶다는 욕심에 어제 아침 이후 컴퓨터에서 밍기적거리던 걸 급하게 끝냈다. 횡설수설의 수준이 영 심상치않다.
덧 2 : 11페이지에 달하는 '존 말코비치 되기' 보고서 이후 존 말코비치가 싫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여전히 깊숙한 그 시선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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