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21일째 ├ S1. 2010-2011

24/09/2010, 맑고 서늘함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잠을 설쳤다. 꿈은 짧고, 밤은 깊고 길었다. 얕은 새벽의 시간보다 더 얕게 잠이 들었는데, 어학원에 갈 때는 두 번이나 전화가 와도 안 일어나던 룸메 언니가 오늘 한국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한다고 7시에 일어나는 소리에 퍼뜩 깨고 말았다. 새벽이 다 가도록 좀처럼 오지 않던 잠은 바스락,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여름 청솔모처럼 잽싸게 아침의 그림자 뒤로 숨어버렸다. 삶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이어진다.

  주말 내내, 그리고 월요일까지 줄곧 놀았던 은행은 드디어 업무를 재개했다. Enfin! 엄마가 입금하셨다는 돈이 들어와 인터넷창에 뜬 계좌 잔액이 묵직하다. 엄마는 분명 5488유로를 보내셨댔는데, 계좌에 찍힌 금액은 5475유로인 걸 보니 13유로는 은행에서 수수료로 먹어버린 모양이다. 오는 데 일주일이 다 걸렸으니, 사라진 13유로는 오는 길에 경비 한 모양이다. 미국 은행은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중 한 명만 수수료를 내면 된다던데, 프랑스 은행은 보내는 사람이 돈을 내도 받는 쪽에서 또 돈을 뗀대서 그냥 엄마가 한국에서 수수료를 물지 않았다고 하셨다. 도둑놈 심보. 프랑스에서는 가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지만, 프랑스 은행에서는 자주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원래 수수료를 16.5유로를 떼어간다고 했는데 13.0유로밖에 빠지지 않을 걸 보니, 이거 또 1주일쯤 후에 뭔가 착오가 있었다면서 3.5유로를 마저 빼가는 황당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밀었다. 룸메 언니는 두달 반동안 창문을 어떻게 여는지도 몰랐다는 게 생각나 갑자기 혼자 마구 우스워졌다. 앗, 거미 발견! 한국에 있었을 때에는 날파리조차 나를 기만하곤 했는데, 여기에서는 대신 벌레 잡아 줄 사람도 없고, 저 거미를 잡지 않으면 왠지 잘 때 내 입으로 통통 튀어 들어올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벌레를 잡는다. 이상하게 여기 거미는 꽁무니에 줄을 매다는 대신 방방 통통 튀어다니고, 이상하게 여기 기숙사는 파브르 곤충기에 버금가는 안느 마리 베데르 곤충기를 써도 될만큼 별별 벌레들이 줄을 지어 등장한다. 난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새끼 손톱의 반의 반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거미에게도 나는 손쉬운 기만의 대상이 되어서 나름 조준한다고 내려친 휴지에는 짜부러진 거미는 보이지 않는다. 또 어디론가 통통 튀었겠지.

  청소기를 밀어놓고, 아침 빨래까지 끝낸 후 11시쯤, 느즈막히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은행에 가서 또 한참을 기다린 후에 RIB을 발급받았다. 물론 인터넷에서 출력할 수도 있었겠지만 첫째. 기숙사에는 프린터가 없다. 둘째. 인쇄를 할 수 있는 다른 장소에 가서 하면 돈을 내야한다. 셋째. 인쇄를 할 수 있는 장소 중 가장 싼 데가 학교인데, 학생증이 아직 없다. 넷째. 사실 인쇄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모른다. 난 LCL의 고객이고, 또 다달이 계좌 이용료를 내니까 나에게는 당당히 은행에 가서 RIB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은행이 계좌를 이용하는 고객에게 이자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계좌 이용료를 받아먹는 나라, 프랑스에는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는 오늘도 Mademoiselle '옹그'가 된다. G 발음 안 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 제발 H좀 발음 좀 해 달라고..!

  은행과 SFR 대리점 사이는, 내 프랑스인 멘토의 표현을 빌리자면 'deux pas', 그러니까 두 발자국 거리이다. 물론 그 친구는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가 가깝다는 의미로 쓴 표현이지만, LCL과 SFR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deux pas 거리이다. 좋아, 두 발자국은 좀 뻥이고 열 발자국 미만. 은행에서 Mademoiselle '옹그' 앞으로 발급받은 RIB 종이를 채 접기도 전에 나는 SFR 앞에 서 있다. 도대체 프랑스는 통신사 대리점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는 아직까지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들어가서 촌티를 팍팍 냈더니 여직원 한 명이 이것저것 물어가며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직원은 책상, 혹은 진열장 뒤에, 손님은 책상, 혹은 진열장 앞에 서서 갈라진 두 공간 사이로 소통해야하는 한국보다 먼저 손님에게 다가와 가까운 거리에서 설명을 하는 프랑스식 일처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이미 공부하고 간 것이 있다고 했더니 말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 직원이 금세 가능한 선택들을 눈 앞에 주욱 펼쳐놓아 주었다.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는 것은 삼성과 LG. 풀터치에 배터리가 오래 가고, 카메라가, 프랑스어 표현을 그대로 한글로 옮기자면, 울트라슈퍼캡짱이고, 블라블라, 점원의 자랑은 줄을 이었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내가 삼성과 LG의 나라,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아니지, 꽤 오래 전에 나온 모델들이니까 쉽게 볼 수 있었던 것들은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것. 기왕 프랑스에 나온 거, 한국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24.9유로짜리, 1시간 기본 통화에 문자와 메신저 무제한, 그리고 tout internet이라는 정체불명의 인터넷 옵션이 딸린 forfait MTV de SFR : Spécial Web을 24개월 약정으로 계약한다. 내가 나는 1년 후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귀국하기 전에 통신사측에 통보만 하면 아무 패널티도 물지 않고 바로 해지가 된다고, 24개월 약정이 훨씬 싼데 뭐하러 비싸게 12개월 약정을 하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전부터 이런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내가 직접 듣고 보니 가장 기본적인 경제활동 원칙에 맞지 않는 직원의 제안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는 귀국해지절차가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얘기 또한 들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나에게 손해될 건 없을 것 같아 24개월 약정으로 BlackBerry를 골랐다. 기계값으로 59유로를 결제하면 50유로를 돌려준다고 했다. 또다시 한참을 기다려 프랑스인들의 일처리를 구경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분명 앞에 컴퓨터를 두고도 느릿느릿한 프랑스 사람들의 일처리 방식이나,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과 잡담을 나누는 직원들, 그런 직원들 때문에 꽤 오래 기다리면서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손님들. 이 모든 것들이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다. 하지만 분명 나 또한 저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핸드폰 분실 보험에 들지 않겠냐는 직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을 때 그 여자가 나를 무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거든. 블랙베리인데, 좋은 핸드폰인데 잃어버리면 아깝지 않겠냐며 여자는 정말로 신기해했다. 흥. 한국에서 8년을 쓰면서도 한 번 잃어버린 적 없는 핸드폰을 설마 프랑스에 와서까지 잃어버리려고. 나의 부주의하지 않음을 철썩같이 믿는 나는 있을지모를 부주의함에 대한 보험으로 다달이 2.5유로씩을 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룸메 언니는 핸드폰을 금방 만든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랑스 기준에서 금방 만든다는 것이고, 한 한 시간쯤 걸려 다시 SFR boutique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바지주머니 안에는 나를 로빈슨 크루소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줄 배의 편도티켓이 들어있었다. 무려 3주만의 문명세계로의 복귀.

My Black BlackBerry
내일 아침에는 알람을 맞춰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Monoprix로 물을 사러 가는데, 엄마를 닮아 멍멍이코같은 내 코가 가끔씩 애용하는 빵집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갓 구운 빵 냄새를 포착했다. 무려 길 맞은 편인데, 이건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할머니 한 분이 오븐에서 막 바게트를 꺼내시길래 0.85유로를 주고 내 팔 길이만한 바게트를 하나 사 왔다. 반을 자르고, 칼집을 넣은 바게트를 들고, Monoprix에 들러 물을 사서 돌아와서는 BlackBerry를 공부한다. 프랑스어, 프랑스어, 프랑스어, 아니면 영어. 분명 핸드폰은 좋은 것 같은데, 모든 기능이 프랑스어나 영어로 디스플레이 되다보니 이건 뭐 감도 잡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너무 뻔해 펴보지도 않던 설명책자를 펴 보지만, 애초에 설명책자에 별 내용이 써 있지도 않다. 이건 뭐지. 하는 수 없이 이것저것 마음대로 만져보며 조금씩 익혀가는 것이, 여기 생활도, 핸드폰도 모두 똑같다.

  엄마한테 번호를 알려드렸더니 당장에 전화가 왔다. My first call. '잘 되나 한 번 해봤어'하고 끊고, 조금 이따가 엄마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가 온다. '핸드폰으로도 잘 되나 한 번 해봤어'. 옆에 있던 룸메 언니가 피실, 웃어버렸다. 우리 집은 원래 이런데, 남이 보면 좀 웃겼을 것도 같다. BBO한테 문자를 보내고, Camille한테도 문자를 보내고, Viçoise L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주소록에는 이 세 사람 뿐인데, 나의 문자 life는 한국에 있을 때의 패턴을 그대로 회복해 오후 내내, 밀린 어제 일기를 꾸역꾸역 쓰면서 영어와 불어를 섞어 문자질로 바빴다. 한글이 아닌 알파벳으로, 한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보내는 문자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accent이 쳐지지 않아 속이 상했지만, 문자무제한 요금제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 했을만큼 손이 바빴다.

  아무 것도 바르지 않아도 이건 정말 천상의 맛이다 싶은 바게트를 뜯어먹으며 하루 종일 어제 일기를 썼다. 금방 쓸 수도 있었을텐데, 머리가 무거워 생각이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생각마저 멈춰버린 듯한 오늘. 노트북으로 TV를 보며 감기에 걸려 쉰 목소리로 킬킬거리는 룸메 언니를 구경하며 침대에서 일기를 썼다. 침대에서 컴퓨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룸메 언니가 하루 종일 방에 있는 날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기 불편하다. 일기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네이트온을 하고, 일기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네이트온을 하고, 일기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프랑스의 해는 하루를 아무런 특별한 것도 하지 않고 보내기엔 너무 길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온 몸이 쑤시는 통에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 하려던 생각은 그냥 접는다. 조용한 날, 조용한 시간들.

  저녁에는 haricot vert를 볶아먹었다. Auchan에 갔을 때 옆에 계신 아주머니께 배운대로 haricot vert를 깨끗이 씻은 다음 양 끝을 잘라냈다. 콩 특유의 푸르딩딩한 냄새가 확 올라오며, 엄마랑 완두콩 까던 생각이 났다. 완두콩을 올려 밥을 해 먹으면 맛있는데, 콩 냄새에서도 집이 그리워진다. 집, 가족들. 새파란 껍질콩을 살짝 데쳐낸 후 버터를 녹여 볶아냈다. 간은 소금으로 조금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이, 그냥 아주머니 설명만 듣고 한 건데도 맛이 괜찮았다. 풀밭의 얕은 녹색 냄새도 나면서 고소하기도 하고, 또 조금 달큼한 맛이 나기도 하고. 단순하지만 멋진 맛이었다. 끝이 갈색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아삭아삭한 양상추를 곁들여 (거의) 채식주의자 식단으로 저녁을 먹었다.

  기숙사에 감기가 도는지 옆방 한국인도, 룸메 언니도, 나도 헤롱헤롱 다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해열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약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아빠 말씀대로, 밥 대신 약을 먹어도 1년동안 가져온 약을 다 먹지 못할테니 멀리서 아파 서러운 사람들끼리 나누는 게 좋다. 감기는 나을 듯 좀처럼 낫지 않아 하루 종일 몸도 머리도 납덩이다.

  내일은 11시에 Odéon에서 S를 만나고, 동양인이 별로 없어 눈에 확 띄는 이 동네 SFR은 민망해서 갈 수 없으니 저 멀리에 있는 SFR에 들러 몇 가지 확인을 하고, 저녁에는 남은 쌀을 톡톡 털어 밥을 한 다음 토마토를 볶아 먹어야지. 어쩌면 어제 먹었던 galette를 흉내내 crêpe를 만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짐을 싸기 시작해야하니 저녁을 먹고서는 분주하게 굴어야 할 것 같다. 고를 것 없이 모든 물건을 다 챙기기만 하면 되는데도 짐싸기는 녹록치 않아 충분히 생각하고 짐을 싸야 할 것이다. 푼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짐을 다시 싸야한다는 건 확실히 번거로운 일이지만, 며칠만 있으면 이 불편한 생활도 끝이라는 사실이 그저 만족스러울 따름이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친절과 친밀함을 가장해 살지만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도 훨씬 좁은 나에게 3주는 가장무도회를 치러내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덧글

  • 2010/08/25 11: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orstalansag_i 2010/08/25 16:26 #

    맙소사, 저 그분 기분이 어땠을지 이해가 가요ㅠㅠ
    제 이름은 성 뿐만 아니라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는 프랑스인이 없던데, 어휴ㅠ 학교 갈 일이 걱정이에요ㅠ
  • 2010/08/25 17: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orstalansag_i 2010/08/25 17:08 #

    보진 않았지만 뭔지 알 것 같아ㅋㅋㅋ
    한국에서 너랑 똑같은 걸로 만들어 온 애도 비슷한 거더라구
    삼성 Bar type 말하는 거 맞지?ㅋㅋ

    너 파리 언제 온댔지?
  • 2010/08/26 14: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orstalansag_i 2010/08/26 16:50 #

    설마 파리바게트를 말하려고 하던 건 아니었다고 말해줘. 제발ㅠㅠ

    블랙베리 별로 안 비싸ㅋㅋ
    59유로짜리긴 해도 결과적으로 9유로에 산 거임!
  • arrogantduck 2010/08/26 23:17 #

    아니 내 머릿속 빠리지앵들은 빵모자 쓰고 담배피고 빠게트를 옆에 끼고다는 사람들임
  • sorstalansag_i 2010/08/27 18:55 #

    다행이군-_-ㅋㅋㅋㅋㅋ
  • arrogantduck 2010/08/27 19:50 #

    난 빠리빠게트와 같은 유치뽕짝한 개그는 하지 않는 다능
  • sorstalansag_i 2010/08/27 19:52 #

    몰랐어
  • arrogantduck 2010/08/27 19:56 #

    이제부터 알면 됬어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