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43, 44, 45일째 ├ S1. 2010-2011

15/09/2010, +43, 맑음

  프랑스에 와서 처음 겪는 Conférence에 아침부터 긴장이 되었다.(너무 긴장되어서 바닥을 걸레로 빡빡 밀어 청소를 한 건 절대 아니라고 우기고 싶다.) 화요일에 Enjeux Scientifiques Cours Magistral 수업이 있고, 수요일에 Conférence라니, 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구나, 싶었다. 바로 전날 들은 수업을 복습하려고 하는데 여자가 말이 너무 빠른데다가 ppt가 휙휙 넘어가는데, 각종 전문용어들을 알아먹을 수가 없어 아침나절까지 듣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마침 서울대에서 오셨다는 분이 Conférence 같은 조이길래 뭐 준비해 가야하냐고 물어봤더니 별다르게 준비할 건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수업을 다 알아듣지 못한 상태에서 Conférence에 가도 되는 건가, 걱정스러웠다. Exposé 손을 확실하게 들 마음의 준비만 단단히 하면 되는 건가. 월, 화, 수, 사흘 째인데 학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는 걸까 싶다.

  마침 수업을 듣는 건물에서 체류증 신청도 받아 3개월이 다 지나기 전 체류증을 신청하려고 서류까지 다 챙겨갔는데,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만 신청을 받는다는 글자만 문 앞에서 씨익 웃고 있고, 문은 꾹 닫혀 있었다. 여기에서는 3층, 우리나라에서는 4층에 있는 강의실을 확인하고 지하까지 내려간 거였는데, 허탕만 치고 다시 4층까지 죽어라 걸어 올라갔다. 높은 구두를 신고도 초스피드로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보고 M. 서울대는 깜짝 놀랐지만, 이 정도 쯤이야. 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도 외솔관과 위당관을 망나니처럼 뛰어다니던 여자인 것이다. 오늘도 자판기에서 내가 셀프로 저어먹어야 하는 모카라떼를 0.5유로 씩이나 주고 뽑아 마셨다.

  난 젊은 프랑스 사람들이 싫다. 말 좀 천천히, 또박또박 해주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지 얼버무리면서 후루룩, 지나가는 속도가 꼭 무슨 빛의 속도 쯤 되는 기분이다. 와, 조교님 너무하십니다. 얼버무리고, 젊은 사람들이 쓰는 속어를 쓰고, 빠르고. 최악의 3박자를 모두 갖췄다. 따라가다 따라가다 결국 머리에서 퓨즈가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피융-
  Exposé를 정하는데 프랑스 애들이 치사하게 굴었다. 조교가 교환학생이 6명이고 프랑스 학생이 11명이니 교환학생을 한 명씩 껴서 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지들끼리 조를 딱 짜버렸다. 교환학생이랑 하면 짐을 떠안는 기분일테니, 솔직히 나라도 하기 싫을 것 같긴 하지만 치사하긴, 흥흥흥. 나는 미국에서 온 여자애랑 조가 되었다. 불어로 하다가 안 되면 영어로 얘기를 하면서도 왠지 불공평하단 느낌. 얘는 지네 나라 말인데....! Anglophone도, Francophone도 아닌 Coréenne는 별 게 다 불만이다. Exposé를 세 개 씩이나 시킨다는 사실에 거의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강의실을 나왔다. 나 살려.

  Sciences-Po는 도서관이 진짜진짜진짜진짜 작다. 정말이지 단과대 도서관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작다. 사회과학분야 장서량이 양적으로건 질적으로건 유럽 3위라는 사실이 절대로 믿어지지 않을만큼 작다. 책도 몇 권 없고, 도서관에 자리도 별로 없는데, 이게 유럽 3위라고?! 하지만 알고보니 책 보관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거였다. 책을 빌리고 싶으면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책을 찾아서 대출 신청서를 작성하면 2~3일 후에 책이 배달되어 오는 시스템이다. 급하게, 혹은 원할 때 책을 빌리고, 이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Philosophie Portative du Temps에서 발표할 책이 다음 주나 되어야 서점에 도착한다길래 그때까지는 급한대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데, 금요일 4시 이후에 찾으러 오라는 말에 뒷골이 땡겨온다. 그래도 주말동안 읽어야겠단 생각으로 일단 대출 신청서를 제출했다. J랑 잠시 A동과 B동 사이에 있는 정원에 앉아있다가 새로 올라온 article을 인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옆 방 사는 언니가 놀러갈 때 필요하다고 스테이크 굽는 법을 배우고 있길래 나도 옆에서 스테이크 소스 만드는 걸 덩달아 공부했다.


16/09/2010, +44, 파리는 맑았는데 블로뉴는 흐림

  10시 15분부터 12시 15분까지, 오전 수업이 완전 패닉이었다. 교수님이 말씀을 천천히, 또박또박 해 주신 건 좋았는데, 이 수많은 텍스트들을 어찌할껴. 이 수업은 여러분들의 앎의 폭을 넓히기 위해 텍스트를 굉장히 많이 다룰 거라고 하시는 바람에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프랑스에서는 수업도, 텍스트도 모두 공포의 대상이다. 출석을 부르면서 교수님이 자기는 중국식 이름에 익숙하지 않지만 연습하겠다고 하신 게 기분이 나빠서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빠득빠득 강조를 했다.

  Saint Germain des Prés 교회 앞에서 K 오빠를 만났다. 파리에 도착한지 3일밖에 안 되었으니, 아직은 좋을 때다. 내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사 가기로 했는데, 카페테리아에서는 카드를 받지 않는 바람에 Cluny la Sorbonne에 있는 LCL에서 돈을 뽑고, Brioche Dorée에서 Classique Poulet를 샀다. Pont des Arts까지 가는 길에 관광 온 한국인 부부를 만나 길 안내를 해 줬다. 흐, 파리에 한 달 반을 살다보니 나같은 길치한테 길을 물어보는 사람도 생기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Pont des Arts에 앉아 Beaux Arts 학생들이 야외수업 나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면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었다. 잃어버렸다는 네비방의 핸드폰은 응답이 없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파리 5대학 도서관으로 가기 전 까르푸에 들러 딸기맛 Volvic을 샀다. BBO가 레몬맛 Volvic이 super bon하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레몬맛을 사러 간 건데, 레몬맛, 민트맛, 오렌지맛, 산딸기맛, 포도맛 Volvic은 1L 이상 사이즈로만 팔길래 딸기맛 나는 물을 마신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으면서도 용감하게 들고 나왔다. 사실 까르푸에서 나온 건 레몬맛 작은 사이즈가 있었지만 과자를 까르푸 상표로 먹는 건 괜찮아도 물이 안 좋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까르푸 물을 마신다는 것이 영 찜찜해서 패스. 지하철 자판기에서는 0.5L 레몬맛 volvic이 1.8유로인데, 까르푸에서는 0.33L 딸기맛 volvic이 0.6유로이다. 지하철 자판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둑놈들이지만 다른 곳에서 레몬맛 Volvic을 구할 수 없다면 어느 날인가 지하철 자판기에 2유로짜리 동전을 밀어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5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집에 와서 20분 쯤 달게 잤다.

  월요일이었나, 모노프리에서 Flan을 사가지고 오다가 엄마가 보내주신 흰 티에 과일물이 들어버렸다. 안 지워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늘 빨아보니 말끔하게 지워져 있어 다행이었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른 과목에 달려들고, 또 공부하고, 공부하고. 한국에서는 일상적이었을 일들까지도 이제는 비일상적인 공부의 영역이 되다보니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내야 할 시간에 끝내고 싶은데, 그러려다보니 하루하루가 점점 더 팍팍해지는 느낌이다. 그 좋아하는 미드도 보고 싶지 않고, 보지 않은 '동이' 에피소드가 3개나 된다는 사실도 식사하면서 드라마 얘기가 나와서야 기억이 난다. 네이트온 켤 시간도 없고, 일기를 쓰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그냥 머리 속에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 존재하기나 했던가 싶은 기분이다. 해야할 일들에 눌려, 나는 점점 더 바보가 되어버린다.


17/09/2010, +45, 개미 눈물만큼 비가 오고 너무 예쁘게 무지개가 뜸

  한 주를 마무리하는 수업 치고 Enjeux Politiques Conférence는 너무나 가혹했다.조교가 오리지널 프랑스인이 아닌지, 발음이 너무 이상해서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자꾸만 한숨이 푹푹 나왔다. 수업시간에 조교가 질문을 많이 던져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대답을 하는데 나는 조교의 질문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말 그대로 패닉상태였다. 안 그래도 '정치학에 관한 지식 전무함'인데, 조교의 발음도 알아들을 수 없고,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도 거의 없고, 난 망했구나, 싶었다.

  도서관에서 수요일에 대출 신청했던 책을 찾아오는 길에 까르푸에 들러 댓땅 커다란 바인더와 과자 부시래기를 샀다. 개강하기 전 바인더를 사긴 했지만 일반적인 사이즈의 바인더를 샀더니 일주일만에 노트와 텍스트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이즈의 바인더가 터질듯이 꽉 차 종이를 넘길 수조차 없게 되어버려 초대형 사이즈의 바인더가 필요해졌다. 전에 Camille 집에 갔을 때 초대형 바인더가 6개 쯤 있었는데, 1년동안 학교에서 한 거라고 해서 설마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이제야 믿는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volet를 내리려고 창문 앞으로 갔는데, 아......! 되게 큰 무지개가 창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땅이 젖기도 전에 비가 그쳤는데, 그렇게 개미 눈물만큼 내린 비로도 이렇게 커다란 무지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기뻐진다. 집에 놀러 온 10층 사는 아이랑 놀고 있던 반이에게 무지개가 떴다고 알려줬더니 자기는 한 번도 무지개를 본 적 없다며 몹시 신기해했다.

  언어교환을 하자고 했던 애한테 메일을 보냈다. 내 멘토인 Camille가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너무 우울해서 초콜렛만 쳐묵쳐묵 하고 있다고 하길래 다음 주 화요일에 super sweet한 크레페를 사 주겠다고 했다. 아마존닷컴에서 책을 주문했다. 발표를 해야하는 책인데, 난 한국에서고 프랑스에서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는 건 죽어라 싫다. 아저씨한테 여쭤봤더니 아마존닷컴이 그래도 책이 가장 싸다고 하셔서 가입부터 하는데, 맙소사. 결제 할 카드를 등록을 하면서 비밀번호도 안 물어봤다. 카드 번호랑 유효기간, 이름을 입력하고 나니 띠리릭, 등록이 된다. 한국에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도 또 휴대폰으로 날아오는 인증코드를 입력하거나, 공인인증서 확인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는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다. 당황스러울만큼 어이가 없어서 심지어 학부모 회의에 간 아줌마를 대신해 저녁으로 먹을 짬뽕을 준비하고 있는 아저씨께 이렇게 하면 결제 끝이냐고 노트북을 들고 가서 여쭤봤다니까. 읽어야 할 텍스트가 어려워 끙끙 앓았다.

  너무 졸립고 피곤해 저녁을 먹고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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