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50, 51, 52일째 ├ S1. 2010-2011

22/09/2010, +50, 파리는 맑고 따뜻함.

  과제에 눌려 죽는 꿈을 꿨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꿈에서 책과 노트가 나를 눌러 죽이려 들었다. 수, 목, 금 3일간 꽁과 나리가 파리에 놀러 온다는 것은 자다가도 벌떡 깰만큼 좋지만 그 기간동안 놀면서 학교 공부를 해내야 한다는 것은 벌떡 깨기 전까지, 꿈에서도 겁에 질릴만큼 무서운 사실이었다. 내가 분명 전부터 꽁에게 숙소를 잡으라고 얘기를 했건만, 만년 느긋하신 꽁님께서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날 밤에 숙소를 못 잡았다고 얘기하면 어떡하니. 한국이 이번에 추석 연휴가 워낙 긴 데다가 유럽은 아직도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레지스도, 한인민박도 모두 꽉 차 방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착하기 바로 전 날 예약하려고 하면 있던 방도 달아난다고. 프랑스존에 올라온 민박은 이미 다 차거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 진짜, 꽁 그냥 노숙하라고 그래!!! 결국 한참을 여기저기 연락해 본 끝에 전에 S가 묵었던 민박에 전화를 해 간신히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해야 할 분량만큼의 공부를 다 하지 못하고 피곤해 뻗어버렸으니 천하의 소심녀인 내가 이 와중에 잠이 올 리가 없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데도 걱정 반, 기대 반,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내일 봐', '좀 이따 봐',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매일 하던 말인데, 50일만에 다시 하는 인사는 울림이 새롭다.

  12h 49, 22/09/2010, Gare de l'Est, Paris, France. 어차피 지하철표를 사야하니 1시 10분에 Gare de l'Est Information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교에서 Gare de l'Est까지는 4호선을 타고 20분 정도. 집에서 가려면 한참 머니 아침 일찍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마중을 가기로 한다. l'Ere des tyrannies를 다 읽었어야 했는데, 마지막 두 문단 정도를 끝내지 못하고 Saint Germain des Prés 역까지 뛰어갔다. 하지만 동역은 전철역이 아니고 기차역인 거다. 난 분명 Information 앞이고, 꽁도 Information 앞이라는데 그 쪼꼬만 Information 앞에는 꽁이 없었다. 결국 내가 있던 Information 직원한테 여기에 다른 Information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밖으로 나가서 길을 건너서 기차역으로 들어가서 다시 지하로 내려가면 반대편에 Information이 있다고 얘기 해 줬다. 뭐래, 원래 역마다 Information은 하나씩밖에 없어서 재수 없으면 지하철 표도 못 사고 반대편 출구로 나갔다 다시 들어가게 되어 있으면서 Gare de l'Est는 지금 기차역이라고 차별 하는 거임? 죽어라 커다란 Gare de l'Est를 헤치고 개미처럼 나아가면서 나는 끊임없이 툴툴거린다. Information/Acceuil 표지판을 한참을 따라가다보니, 아....! 꽁이랑 나리다...! 익숙한 얼굴이 너무 반가워 야수처럼 괴성을 지르며 뛰어갔다.

  Paris Visit을 끊어서(근데 자판기가 꽁의 카드를 거부하는 바람에+꽁이 아빠 카드 비밀번호를 모르는 바람에 내 카드로 결제했다. 현금으로 받긴 했지만 이번 달 카드비가 장난이 아닐 듯?!) 학교 쪽으로 돌아왔다. Saint Germain des Prés에서 내려서는 Boulevard de Saint Germain을 따라 학교까지 왔다.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서 A동과 B동 사이의 cour에서 자근자근 뜯어 먹는데, 날마다 먹어 익숙한 음식이지만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먹는다는 사실이 몹시 낯설었다. 꽁 말대로 사람들만 가위로 오려내 낯선 장소에 붙여 놓은 느낌. 나는 2시 45분부터 4시 45분까지 수업이 있어 5시 반에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에 잠시 들러 아침에 다 읽지 못한 텍스트를 마저 읽었다. 그리고 5시 30분을 10분 쯤 남겨두고, 다시 파리의 거리로 나를 내던진다. 학교에서 오르세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7분 정도. 파리 한복판에 학교가 있으니 친구를 오르세 미술관에 맡겨 뒀다가 찾으러 갈 수도 있고, 참 좋다. 골목골목 익숙한 지름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센느강변으로 나왔다. 느긋하게 걸었는데도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다. 오르세 미술관 앞 광장 건너편으로 나오는 꽁의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동상 앞에 앉아 나리를 기다렸다. 우리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조각상 역시 어느 현대의 유명한 예술품이라 전근대적 현대를 압축해놓은 이곳에 서 있는 것일테지만 여기, 파리에서는 모든 예술품들의 발치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예술적인 삶의 공간의 일부가 된다. 나리의 전화를 받고 Pont Royal을 건너 Jardin des Tuileries로 나리를 만나러 간다. Tuileries 정원과 Carrousel 정원 사이에 앉아 내가 싸 간 샌드위치와 찹쌀떡을 먹었다. 하숙집 아줌마가 주신 찹쌀떡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으럇차, 기운을 내 루브르 피라미드 앞으로 해서 Rue du Rivoli로 빠져나와 Quai du Louvre를 따라 걷는다. 원래 Pont d'Arcole를 건너 바로 Notre-Dame까지 가려고 했지만 지역번호를 03으로 쓰는 꼬맹이 전화를 해서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기 집에 친구들을 데려와도 되냐고 하는 바람에(아니, 내가 난 너네 엄마가 아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전화 잘못 건 것 같다, 여기는 파리다, 한 다섯 번 쯤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다섯 번 다 '엄마, 농담하지 말구요' 반응이 나오는 건데-_-?!) 정신이 홀딱 팔려 Pont Notre Dame를 건너고 말았다. 결국 Quai de la Corse 앞에서 Hotel de Ville을 배경으로 지나가던 아저씨한테 부탁해 사진만 찍었다. Notre-Dame은 왜인지 문이 닫혀 있어 내부 구경은 패스. 다시 북역으로 가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나리 가방을 찾아 Odéon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Camille가 데려갔던 Crêperie에 이제는 내가 친구들을 데리고 간다. 나는 Jambon, Fromage, Oeuf가 들어간 Galette Traditionnelle Complète, 꽁은 Fromage와 Oeuf, 그리고 Tomate가 들어간 Galette Traditionnelle Tomate, 나리는 배가 고프지 않다며 딸기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Crêpe와 Cidre Normand brut. 이 집 크레페는 언제나 맛있다. Pont des Arts에서, 최고로 멋있는 파리의 야경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꽁의 관절염이 도지는 바람에 일찍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Odéon에서 전철을 태워 보내고 나서 민박집 아주머니께 전화를 하려고 했더니 지하철 안이라 통화권이탈 메세지가 뜨는 바람에(여긴 참 신기한 나라라니까. 지하철이 되는 구간이 있고, 안 되는 구간이 있다) 친구들이 가고 있다고, 잘 부탁한다고 문자메세지를 넣었다. 보름이라는데, 한국에서는 추석이라고 전도 빚어 부치고, 나물도 무치고, 송편도 사서 제사를 지내고 맛있게 저녁도 먹었을텐데, 프랑스 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추석인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이제는 익숙하던 이곳이 확 낯설게 느껴진다.


23/09/2010, +51, 맑다가 갑자기 비 쏟아지는 건 파리가 1등임.

  이번 파업의 테마는 '퇴직'이었다. 파리 이곳저곳에 'J'ai seize ans, mais je veux retraiter' 뭐 이런 비슷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아침 10시 15분 수업인데, 저번 파업 때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집에 왔던 생각이 나 새벽부터 일어나서는 부산을 떨었다. 꽁에게 가져다 줄 소염제를 절반 쯤 비닐봉지에 쉬익 부어 들고는 절대 늦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8시 20분 쯤 집을 뛰쳐나왔다. 어라, 근데 9호선 Billancourt역 le prochain train dans 1 minute, 10호선 Michel-Ange Monlitor역 le porchain train dans 3 minutes. 억세게 재수가 좋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열차를 탈 수 있었다. 9호선도, 10호선도 종점이 멀지 않지만 열차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내리려면 Pardon 소리를 열 번 쯤 해야하지만 그래도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니, 총파업하는 날 치고는 agréable한 등교길이다. 파리에 온 지 두 달만에 총파업을 두 번이나 목격했지만, 프랑스의 파업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한국에서는 작년 11월인가에 철도노조 파업을 했을 때 사람들이 노조원들 욕을 바가지로 해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여기는 타인의 파업할 권리를 굉장히 담담하게 인정해주는 분위기이다. '음. 오늘도 또 파업이구나. 그래, 뭐, 파업 할 수도 있지.' 자신의 삶이 조금 불편해져도 사람들은 파업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생각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열차 기다리는 시간이 15분이 넘어서면 오지 않는 전철 시간표를 탓하며 거친 말을 내어담기 시작하지만, 이 때에도 비난의 대상은 파업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프랑스의 파업에 대해 여러 번 배우고 왔음에도 늘 놀랍다. 결국 9시가 되기도 전에 학교에 도착하는 바람에 도서관이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아 공부를 했다. 3층의, 도서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개인석. 자기는 발목이 아파 나가지 못하겠으니 약과 점심 샌드위치를 들고 숙소로 배달을 오라고 꽁에게 문자가 왔다.

  난 참 착한 친구다. 수업을 듣고, 카페테리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작은 B동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사서는(내가 닭가슴살 샌드위치 formule에 치즈 샌드위치도 추가해 달라고 했더니 점원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Porte de Choisy에 있는 꽁네 민박집까지 손수 찾아가 드렸다. 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13구가 파리의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간판도 절반 이상이 중국어이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절반 이상이 동양인이고, 우편함에 붙어 있는 이름도 절반 이상이 중국 이름이다. 어, 신기해.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고 민박집에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나리는 아침 일찍 나갔다지만, 워낙에 야물딱지고 어디 가서도 절대 손해볼 아이는 아니니, 파리에 혼자 떨궈놨어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꽁이 사다 준 아리보를 나눠 먹으며 민박집에 널부러져 있는데 번쩍 우르르 쾅쾅,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지더니 곧 다시 날이 갠다. 파리가 다 그렇지 뭐. 이 조그마한 도시에서 어쩜 이렇게 날씨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건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꽁한테 부르다 목이 쉬어버리는 나의 곰 125마리 노래를 가르쳐줬다. 소염제를 먹고 나서 꽁 발목이 조금 괜찮아져 밖으로 나왔다.

  한인마트에 간 꽁은 신이 났다. 한바탕 돌아보더니 뭘 사야할지 모르겠다며 떡을 잔뜩 담고, 찰떡파이를 사고, 부침가루를 사고, 비비빅? 하여간 팥 아이스크림을 사고, 아이스찰떡을 샀다. 부침가루랑 아이스크림 빼고는 다 떡-_-;; 나는 한인마트가 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에 도착한 이후로 한 번도 한국식 먹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만큼 반갑지 않았는데, 독일 본에서 온 꽁은 안 그런 모양이다. 역시 파리가 우월해, 훗 :) Opéra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에 Monoprix에 들러 Pim's 오렌지를 샀다. 내가 프랑스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과자를 꽁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었다. Carambar는 초코맛이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 사지 않았다. Opéra 앞에 있는 쿠키 가게에 들어갔는데, 맙소사... 이게 웬 떡! 파리에서 맛보기 과자를 얻어 먹다니,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Auchant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진짜 눈물나게 맛있었다. 사고싶어지잖아...! 하지만 무시무시하게 비싼 데다가 파리에는 꼭 비싸지 않아도 맛있는 과자가 잔뜩이니 자제해야지. 개인적으로 파리에 와서 꼭 먹어야하는 음식으로 Croissant과 Elcair를 꼽고 싶어 꽁을 Paul로 데려갔다. 꼬마 니꼴라에서 뚱뚱한 애가 맨날 먹는 게 Eclair였는데, 그 꼬맹이 이름이 영 생각이 나질 않는다. 꽁이 엽서를 사고 싶어해 손에 들고 있던 Eclair를 한입에 밀어넣고 엽서 구경을 들어갔다.

  Chaussée d'Antin-La Fayette에서 9호선을 타고 Franklin D. Roosevelt에서 내려 Champs-Elysées를 따라 개선문까지 걸었다. 이 커다란 거리는 언제 와도 파리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이국적이다. '파리는 상업적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틀리지만 Opéra Garnier를 중심으로 Boulevard Haussmann과 Boulevard des Capucines, Boulevard des Italiens, Boulevard de Madeleine로 이어지는 중심가와 Champs-Elysées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거, 참.
  Disney 매장에 들어갔다. 전에는 카메라를 손에 쥐고 들어갔더니 매장 입구에서 댓땅 무섭게 생긴 흑인 경비원 아저씨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오늘은 핸드폰 카메라가 있다, 이거다. 오늘은 사진 찍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았으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암, 그렇고 말고. 한 달 전에 갔을 때에는 Toy Story 컨셉이더니 오늘은 Maison de Mickey 컨셉인지 사방천지가 미키, 미니이다. 미키라면 환장을 하는 우리집 고사미가 생각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들이나 입는 미니 옷을 보내줄 수는 없다.(미키 옷은... 말을 말아야지^^) 지하로 내려가서 인형 사진을 잔뜩 '몰래' 찍었다. 난 인형이 너무 좋은데, 참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다는 말씀. 꽁이 내가 몰래 사진 찍는다고 경비원에게 꼬지르겠다고 협박했지만 꽁이 시범을 보여준 바디랭귀지만 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절대 알 수 없었다. 난 경비원이 못 알아듣고 헤매는 사이에 후다닥 도망가면 될 것 같아 마음 놓고 '몰래' 사진찍기를 계속했다. 흐으.

  개선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결국 Champs-Elysées Monoprix에서 산 Carambar original을 오물거리며 사진 구경을 했다. 내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 꽁 디카에 있는 사진들. 오리의 익숙한 얼굴이 나오자 반가웠다. 옛날 사진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두 달 전, 아니면 2010년 겨울 사진들인데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꽁이랑 나, 둘만 있자니 두 달 전도, 아홉 달 전도 굉장히 오래 된 옛날 같았다. 나리는 Luxembourg 공원에 조금 더 널부러져 있겠다고 해서 꽁이랑 Brioche Dorée에서 저녁을 먹었다. Croissant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꽁은 결국 소원 성취를 했다.

  버스를 타고 에펠탑에 갔다. 발목이 아파 프랑스에 다녀왔으면서 독일에 돌아가 친구들이 '에펠탑 봤어?'라고 물어볼 때 '아니, 못 봤어'라는 대답을 하는 상상까지 했던 꽁은 finally! 에펠탑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마침 불쇼를 하고 있어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며 걸었다. 인증샷을 찍고는 센느강변에 앉아 나리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운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낯설지 않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Pim's를 먹어치우고, 꽁이 한인마트에서 산 경단도 먹어치우고, 유람선이 지나갈 때면 사진도 찍고, 에펠탑에 반짝, 불이 들어오면 '반짝반짝 에펠탑' 노래를 넣어 동영상을 찍고, 이야기를 하고, 웃고. 일상적이었던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하고, 감사하다. 나리가 와 나란히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와보니 저번 금요일에 주문했던 책이 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Gibert Joseph에서 사는 거였는데, 화요일에 배송된다고 해서 주문한 건데 여기가 프랑스란 걸 간과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휴, 속터져.


24/09/2010, +52, 맑은데도 비가 쏴아- 내리는 파리 날씨의 심보는?!

  아침 10시에 Gare du Nord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9시 10분이 조금 넘어있었다. 아무데고 걸터 앉아 Trahir le Temps을 읽었다. 한국에서였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내 위생관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이제는 내키는 데 걸터앉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다. 사물함에 나리의 짐과, 꽁의 완소 한인마트 비닐봉지와, 어젯밤에 그 자리에서 꽁에게 팔아 넘긴 나의 사랑하는 빨간 쿠쿠 밥솥을 넣어두고 버스를 타고 Montmartre로 간다. 전철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지하철이 말 그대로 '지하'철인 파리에서는 지하철만 타고 다녔다간 제대로 파리 구경을 할 수 없다. 꽁이 계단을 올라가겠다고 빡빡 우겼던 걸 상기시키며(오늘은 보고 결정하겠다고 빡빡 우겼지만...!) 팔찌사기단을 피해 모두들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넣고 계단을 오른다. 그닥 높지는 않은,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건물이 없는 파리에서 가장 하늘 가까이에 있는 하얀 성당을 향해 나 있어 끝에 서고 나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탁, 트인 발 밑으로 파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날이 흐려 흐릿하게 보이는 파리는 서울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 괜히 더 멋있어 보인다.(물론 부다페스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성당 앞 계단에 널부러져 앉아 흑인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나름 음반도 낸 모양인데, 노래를 정말 잘 불렀지만 10유로 씩이나 주고 음반을 살 엄두는 나지 않아 성당을 찍는 척 하며 몰래 녹음을 했다. 귀를 간질이는 노래를 라이브로 들으며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정말 최고다.

  Montmartre는 아기자기한 느낌이 참 좋다.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분위기가 좋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시청에서 허가를 받아 작업하는 거리의 예술가들의 그림은 어딘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맛이 있다. 5년 전 파리에 왔을 때 그림을 샀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비슷한 그림을 팔고 있길래 반가워 구경을 했더니 'Vous parlez français?'하며 붙임성 좋게 말을 건다. 그래서 5년 전에 당신 그림을 사 가서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더니 그럼 그 때는 완전 어렸을 때였겠다며 지금은 뭘 하는지,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파리에 사는지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 때는 프랑스어를 공부한 지 반 년밖에 되지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신기하다. 병아리랑 곰 생각이 났다. 오전 내내 한 때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Montmartre를 기웃거린다.

  Odéon으로 돌아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학생식당에 갔다가 죽게 고생했다. 카드를 2유로를 주고 사서 크레딧을 충전하고, 음식을 받는데, 이거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겅미?! 완전 바보같이 해메다가 스파게티를 받았는데, 꽁이 했다는 죽파게티도 이것보단 맛있을 것 같았다. 소금만 넣어 기름에 볶은 스파게티에 이상한 고로케, 과일을 갈아 만든 디저트를 3유로를 주고 먹자니 학관 맛나샘 생각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프랑스 애들한테 물어봐서 제대로 와야지. 나에게 Philosophie Portative du Temps 수업 노트를 기꺼이 넘겨 준 반장 막심씨를 옆자리에서 만났다. 막 앞으로도 자기가 노트를 주겠다고 먼저 얘기해줘서 완전 고마웠다. C'est gentil! 하지만 수업시간에 한 걸로 기말고사 안 나온다고 해서 쇼크...... 헉, 말도 안돼! 이건 아침에 Gare du Nord에서 중국인 아줌마가 나한테 중국인이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중국어로 막 뭐라고 엄청 길게, 그리고 엄청 빠르게 얘기를 해서 얼떨결에 다 듣고 난 다음에 '我不是中國人'이 순간 기억이 안 나 'I'm Korean'이라고 했더니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이 '아!' 하더니 후다다닥 가 버렸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중국애랑 친하게 지냈다는 걸 기억해 낸 막심이 한국 사람들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다 알아듣냐고 물어봐서 아니라고 했더니 프랑스 애들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알아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신기해했다. 자기네한텐 다 비슷하게 들리는 모양이지? 하지만 지네도 같은 유럽이어도 러시아어는 몰라서 러시아애랑 영어로 얘기하고 있었으면서, 흥.

  꽁과 나리를 Jardin du Luxembourg까지 데려다줬다. 꽁이 젤라또를 먹고 싶어해 Panthéon 앞에서 젤라도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를 찾아냈다. 위치 기억력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왠지 Panthéon 앞에는 있을 것 같더라니까. 2시 45분 수업이라 역까지 같이 가지 못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인사를 했다. B동까지 뛰어와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내려 Jardin du Luxembourg에 있을 꽁과 나리가 조금 걱정이 됐다. 비 내리고 나면 의자가 젖어 앉을 데도 없을텐데.
  Enjeux Politiques Coférence는 여러모로 따라가기 힘든 수업이다. 조교 발음도 알아들을 수가 없고,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던진다. 스무 명 가량의 학생들 중 교환학생은 나, 미국 애 3, 호주 애 하나, 다섯 명 뿐이라 조교가 질문을 하면 다섯 명만 조용하고 다들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특히 애 하나가 깝친다 싶을만큼 말이 많은데, 조금 많이 급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 프랑스 애들이 모두 걔를 까기 위해 달려든다. 그럼 나처럼 francophone이 아닌 교환학생들은 다들 얼빠진 표정이 되어 이쪽 저쪽 말 하는 사람을 따라 고개만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으... 토론이 딴 데로 새어버려 꽁이 주고 간 엽서를 읽었다. 꽁의 익숙한 글씨. 곧 독일로 답장을 써야지, 생각한다.

  수업이 끝나고 아직 기차가 떠나지 않았을 꽁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결국 문자를 보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보혜랑 나오는 길에 핸드폰을 던졌는데(고의가 절대 아니었다) 물이 들어갔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떨어져나간 배터리를 끼우니 자기가 알아서 멀쩡하게 켜져 다행이었다. 어디 긁힌 데도 없고, 블랙베리가 생각보다 튼튼한 모양이다. 학교 도서관이 화요일까지 문을 닫아 Panthéon 근처에 있다는 도서관에 찾아갔는데 여권이 없어 등록을 하지는 못했다. 우체국에서 등기로 체류증 서류를 보내고(프랑스 우체국 시스템에 빨리 적응을 해야지, 너무 복잡하다.) 괜히 여기저기 구경만 하다 집에 들어와 그대로 뻗어버렸다. 아까 수업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더니(난 분명 설탕 든 커피를 주문했는데, 자판기에 설탕이 다 떨어졌는지 구정물같이 쓴 커피가 나와 다 마시느라 엄청 고생했다) 졸립고 피곤해 죽겠는데 잠을 잘 수 없었다. 얕게 든 잠에 계속 깼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머리가 쪼개져 나갈 것 같아 저녁을 먹고 타이레놀을 먹었지만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어 블랙베리에 있던 사진을 모두 싸이에 올렸다.

  사흘동안, 반가운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았지만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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