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53일째 ├ S1. 2010-2011

26/09/2010, +53, 아침에는 맑았지만 오후부터 구질구질 비가 내림

  K언니가 파리에 왔다. 160일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파리에 다시 들렀고 했다. 전부터 벼르고, 벼르고 있었는데,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아침 10시 반, 언니 숙소 근처에 있는 Alésia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를 싸려고 냉장고를 딱 열었더니.... 헉, 속이 0.3인분밖에 남아있지 않다. 에이, 하는 수 없지. 오늘은 기필코 BNF에 가서 공부하기로 다짐을 하고 거대한 노트북까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하늘이 추운 색이라 나오기 직전 외투를 두꺼운 것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날이 많이 추웠다.

  Porte de St. Cloud까지 9호선을 타고 와 62번 버스로 갈아탔다.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이팟을 들으며 밖을 내다보는데 창밖을 지나는 풍경에 절대로 무심할 수 없었다. 중심부가 아닌 파리는 한산하고 여유로워 대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Auteuil를 지나면서 Dumas의 <Comte de Monte Christo>를 생각한다. 62번 버스가 왠지 낯익다 했더니 알고보니 예전에 살던 동네 기숙사 바로 앞을 지나는 버스 노선이었다. 일상에 치여 일요일에 Convention에 장이 선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장을 보러 직접 다니던 곳을 이제는 버스를 타고 구경하며 지나간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장 구경을 하러 와야지, 생각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파리가 너무 예뻐 귓가를 흐르는 음악만큼이나 기분이 내내 좋았다.

  Alésia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오늘은 방향을 제대로 잡아탔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류장 이름에 Alésia가 들어가길래 아무 생각 없이 번떡, 내렸더니 음... 여기가 아니네?! 하지만 이제 길 물어보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station du Métro Alésia를 어떻게 가냐고 물었더니 그냥 주욱- 가랜다. 노트북으로 뚱뚱해진 가방을 짊어지고 부지런히 걸어갔더니 버스정류장 두 개를 더 지나고 세 개에 미치기 전, 만나기로 약속한 Eglise de St. Pierre Montrouge 앞으로 Alésia 역이 보인다.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는 파리의 이국적인 아침이 너무 마음에 들어 1년이 지나기 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파리의 한적한 아침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K언니를 만났다. 저번 그루터기 엠티 이후로 처음이니, 무려 8개월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 160일동안 카우치서핑과 히치하이킹을 남발하며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언니는 조금 피곤해보였지만 여전히 밝고 아름다웠다. 파리에 1년 살러 온 사람이 160일동안 여행하고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잠깐 들른 사람에게 뭔가를 얻어먹는다는 사실은 굉장히 우습지만 언니는 돈이 많이 남았다며 부득불 케이크와 커피 값을 치뤘다. Alésia에서 발견한, 완전 sympa한 boulangerie, Dominiaue Saibron에서 커피와 핫쵸코, flan과 초콜렛무스케이크를 시켜놓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떠드는데, 언니랑 나만 한국어로 입을 털었다.(이번 주는 아무래도 입 터는 주인 듯). 어째서 지나간 이야기는 이렇게 재밌는 걸까? 언니의 무용담(?!)을 듣고 있자니, 30분 전까지만 해도 여행객 기분을 제대로 냈으면서도 더 새로운 것을 찾아 휙, 여행을 떠나고 싶어져버렸다. B오빠가 도착해서 서로 인사를 하는데 왠지 되게 웃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 고등학교 선배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 대학교 선배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후배에요"

  언니랑 내년 여름 엠티를 기약하며 헤어져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더니 BNF,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çois Mitterrand이 금방이다. 그래, 저기야...! 교과서에 나왔던 저기...! 시설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으아, 이건 좀 최고다. 무려 가방 검사도 받고, 금속탐지기를 지나서 들어가자 등록을 하게 되어있다. 하루 이용료는 3.3유로, 1년에 20유로. 원래는 오늘만 등록하고 눈치 좀 보다가 괜찮으면 1년을 등록하려는 생각이었는데, Acceuil l'Est까지 가는 길에 단박에 1년치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해버렸다. Porte de St. Cloud 종점에서 62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Alésia에 내려서 완전 sympa한 빵집에서 빵을 사고, 다시 62번 버스를 타고 반대편 종점까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면, 길이 먼지도 모를 것 같았다. 직원이 pièce d'identité(프랑스 국민인 경우에는 민증 비스무리한 거, 외국인의 경우에는 여권)를 내놓으라는데, 비 오는 날 우산도 놓고 온 마당에 가방에 여권이 들어있을 리가 없다. Sciences-Po 학생증을 꺼내고, 예전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주민등록증으로 뚫은 기억이 나 우리 나라 주민등록증을 떡하니 꺼내놓고 이건 우리 나라 pièce d'identité라고 빡빡 우겼다. 조마조마한 0.3초. 하지만.... 뚫렸다...! 아줌마가 안경을 치켜뜨면서 '아, 이건 나는 잘 못 알아보는데' 하시면서도 받아주셨다. 즉석에서 사진을 찍고(이 나라는 웹캠을 오용하는 경우가 종종, 하지만 자주 생겨서 문제다.) 은색 삐까뻔쩍한 출입증을 발급받았다. 파리 시내에 사는 B 오빠는 우편번호를 댈 때 완전 간단하게 "14e arrondissement" 이라고 대답했는데, 파리 외곽에 사는 나는 92100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완전 고민하다가 "neuf, deux, et cent" 요래버렸다. 아줌마가 눈썹을 치켜뜨면서 "neuf, deux, et cent?"하고 말꼬리도 같이 올리는 걸 보니, 아차, 뭔가 잘못 말했구나 싶다. Dominique Saibron에서 사 온, 뭔가 굉장히 신기한 맛이 나는 Tournicoti rose를 점심으로 우걱우걱 먹고 공부를 시작한다.

  아, 맙소사. BNF는 현대적인 banlieu 느낌이 물씬 나는 건물 외관도 좋지만 내부는 진짜 완전완전 좋았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는다.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대 단점이긴 하지만(근처 맥도날드 신호가 네트워크에 잡히긴 했지만 너무 약해 실제로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면학분위기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좋았다. 사실 한국 인터넷 세대식 공부 스타일에 익숙해진 나는 인터넷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 쓰려고 다른 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나의 완소 전자사전 D100은 불한/한불 사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백과사전도 제공한다, 이거다. 불불사전을 새끼사전만 들고 갔더니 찾는 단어의 뉘앙스를 살려내지 못해 아쉬웠지만 엄청난 면학분위기 속에서 내 머리는 팽팽 돌아가니 괜찮다. 처음 준비하는 exposé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Camille한테 문자를 보내 물어봤더니 당장에 답이 돌아온다. Merci :) 화요일 저녁에 Emma네 집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기로 했는데, 재료를 사러 한인마트에 가는 김에 알록달록 오색경단이라도 사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보혜를 만나 잠깐 또 수다 :D

  자체마감을 오늘 밤 늦게까지로 잡고 있었는데, 6시 45분 도서관 문을 닫기 전에 모두 끝내고 다른 공부를 더 할 수 있었다. 다시 62번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B 오빠를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중간에 "떨궈 놓고" Porte de St. Cloud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오는데, 저 멀리 에펠탑에 불이 켜진 것이 보일 때에도, Apollinaire가 흐르는 시의 주제로 삼은 Pont Mirabeau를 건널 때에도, 소설 속에서 Monte Christo 백작이 살았던 Auteuil를 지날 때에도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도착한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일상의 풍경에 사람을 이렇게 설레이게 할 수있다는 것은 파리만이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Je t'aime Paris, 나는 진부한 영화의 제목을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된다. 오늘 끝낼 분량을 일찌감치 끝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집에 오자마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하숙집 아줌마에게 자랑을 했다. 여기서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언제나 충만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녁 먹고 공부를 해야하는데, 왠지 하기가 싫어서 한참을 밍기적거리고 놀다가 일기를 썼다. 내일은 수업이 3과목이나 있는 지옥같은(!) 월요일이라 일찍 자야하는데, 이미 시간은 1시가 훨씬 지났지만 아까 낮에 마신 커피 때문에 영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도 걱정의 30000%를 차지하는 Philosophie Portative du Temps의 필기를 주겠다는 막심느님을 믿고.... 아,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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