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삼사 ├ S1. 2010-2011

#1
  지긋지긋하게 길었던 한 주가 끝나고, 날이 다시 밝기 전까지는, 잠시간의 휴식. 정말로 바빠지기 전에 이삿짐을 조금씩 싸는데,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줄리엣이 좋아하는 꽃분홍색 코트에서 떼어낸 것은 명백하게 내 것이 아니지만 주인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금발의 머리카락이라 대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곳의 햇빛을 상상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이삿짐이 되었건, 여행가방이 되었건 짐싸기의 달인이지만 지하철로 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도대체 몇 번을 어떻게 왔다갔다 해야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창 밖에는 밝은 봄이 만연한 나의 밤은 막막하다.

#2
  난 촘스키 완전 좋아한다고, 촘스키는 내가 공부하지 않는 시간동안 읽고 싶은 책이라고 했더니 '이건 한국식 조크야, 아니면 네가 미친 거야?' 요러고 있다. Hein, je suis FOLLE!! 프랑스 어학의 이해 수업에서 촘스키의 생성문법이론을 배우며 그 진부한 천재성에 감탄했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먼 날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오늘은, banal에 해당되는 한국어 단어가 손가락 끝에서만 빙빙 맴돌아 곤혹스러운 프랑스를 천천히 흘러간다.

#3
  엄마에게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아직까지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까닭은 꼬이고 꼬인 17차원의 미로처럼 나의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늘어져있다. 그건 6월 말에 동생이 도착하면 좋든 싫든 그 다음 날 쯤 엄마아빠 귀에 들어갈테니 언젠가는 말해야 하는 사실이기 때문이고, 내가 만일 엄마였더라면 알고 싶어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말을 하게 된다면 내가 선택하게 될 표현의 깊이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나의 '선언'이 잔잔한 수면과도 같은 식구들의 삶의 공간에 풍덩, 돌을 떨어뜨리게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으로 긴 전화를 걸 수 있는 날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 정말로 어떤 선택을 나에게 강요해야 하는 것일까?

#4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반 나절의 휴식에도 죄책감이 든다면, 그건 정말로 문제가 있는 거다.

덧글

  • 2011/04/21 14: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1/04/21 15:33 #

    #3 그래도 말해야겠지?
    #4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아ㅠㅠ
  • 2011/04/22 20:1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1/04/23 02:22 #

    그지? 어차피 맞을 매라면....ㅠㅠ 아, 근데 그럼 동생 오기 전까지 이것저것 집에서 엄청 귀찮게 할거란 말야ㅠㅠ
  • 2011/04/23 08: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1/04/23 16:24 #

    눈물나게 고마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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