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guignol이란 단어를 배운 건 Hôtel de Ville을 지나 Maris 지구의 작은 골목을 걷던 어느 오후였다. Guignol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무심히 지나친 나에게 C는 guignol은 손가락을 넣어 움직이는 인형인데, Lyon 출신의 치과의사가 진료를 받는 어린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이게 엄청난 성공을 거둬 Laurent Mourguet라는 이름의 이 치과의사는 병원을 닫고 평생 손가락 인형극을 하면서 살았다고, 사실 guignol은 인형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워낙 유명하다보니 손가락인형극 전체를 가리키는 하나의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고 설명을 해줬다. 언제나처럼, 진지한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는 내가 좋아하는, :D를 닮은 웃음으로 Lyon에 가면 guignol 전용 극장이 있다고 덧붙였더랬다. 3월, 아직은 추운 Paris의 지붕은 코끝이 간질간질 꼭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의 하늘색이었고, 계절이 지나는 6월의 하늘이 좁다랗게 보이는 Lyon의 길거리에서 나는 guignol을 만났다.

Lyon의 건물들이 내게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과거에는 햇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을 빨갛고 노란 건물벽. 하나같은 옅은 회색 벽과 하나같은 청회색 지붕과 하나같이 화려한 창문을 가지고 있는 Paris의 건물들과 달리 그저 네모진 창문이 시간이 먼지처럼 내려앉은 색색의 벽에 멋없이 달려있는 Lyon의 골목은 내가 가보지 못한 이탈리아의 어디쯤을 상상하게 한다. 아직은 더 많이 어리던 까마득한 일곱살, 견고한 요새의 성벽처럼 거대했던 거실 소파에 앉아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탐욕스럽게 읽어치우던 나는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며 이탈리아에 가는 꿈을 꾸곤 했었는데.

Lyon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은 아주아주 느리게 뛰는 시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는 점. 아예 따로 구획지어진 로마시대 원형극장이나 교회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어 무심결에 지나가게되는 돌기둥이나 건물들도 걸핏하면 12세기,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늘 두 걸음 쯤 지나친 곳에서 휙,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살아있는, 하지만 아주 느린 속도로 생명을 사는 도시의 시간.
그에 비하면 traboule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시간에 속한다. Traboule은 두 개의 길을 잇는, 건물 사이로 난 자그마한 골목인데 ㅁ자로 배치된 건물 가운데에 있는 정원인 cour를 통해 연결되는 길이라 세계 2차대전 당시 Résistance들이 Milice(친독의용대)와 Nazi의 추적을 따돌리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건물 밖에서 보면 여타 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문 뒤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 한 추적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추적당하는 자가 건물 너머에 있는 다른 길로 달아났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는 산과 언덕이 많은 Lyon 시내를 가로질러 직물을 보다 편리하게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진 Croix Rousse의 traboule은 노동운동에 참가한 canut들의(Lyon 견직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역사가 지난 장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어떤 특별함도 없이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아직도 이렇게나 생소할 수 있음은 조금은 슬픈 일일 것이다. 박물관화 된 나라는 우리나라인 것일까, 프랑스인 것일까.

Saône 강을 가로지르는 Passerelle Saint-Georges를 건너면
Saône강과 Rhône강, 두 개의 강이 만나는 Lyon의 중심가.

광장이 이렇게 크고, 이렇게 황량하기도 힘들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크고 황량했던 Bellecour. Bellecour는 굳이 단어를 자르자면 아름다운 안뜰(ㅁ자 건물 가운데에 있는 '자그마한' 안뜰)이란 뜻이지만 cour치고는 좀 심하게 큰 감이 없잖아 있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Lyon offce du tourisme이 Bellecour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뺑뺑 돌아서 도착한 데다가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한낮의 태양을 가려줄 그늘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그리고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규모 때문에 광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베큐가 될 것 같은 경험마저 하는 바람에 내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장소. Office du tourisme은 보통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에 있는데, Lyon이 프랑스 도시 치고는 굉장히 큰 편에 속하는 도시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가 어디인지조차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기차를 탄 것은 솔직히 '무계획 여행' 컨셉 치고도 많이 무책임한 태도였다.
+ 참고로 Lyon의 Office du Tourisme은 Bellecour와 Vieux Lyon에 있다.

Lyon에서 couchsurfing을 구하려고 했는데 잘 구해지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Lyon에 있는 주말동안 Paris에 Roland Garros를 보러 상경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Lyon Emergency Request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구한 couchsurfing host는 Saint-Cyr-Mont-d'Or라는, Métro D 종점인 Gare de Vaise에서도 20분 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산속을 올라가면 그림처럼 나타나는 자그맣고 조용한 마을에 살고 있는, 꼭 그 마을처럼 자그맣고 따뜻한 사람.
Saint-Cyr-au-Mont-d'Or 동네 입구에는 12세기인가 13세기인가에 지어졌다는 성의 일부가 남아 있어 산책하기에 좋았다.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Bonjour하고 인사를 하고, '비가 온 뒤라 꽃이 더 예쁘게 폈어요'하고 낯선 사람에게도 예쁜 말을 건네는사람들의 따스함 때문에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리는 동네였다.


(심지어 이름도 '언덕 공원' ^^)
그저 편하게 케이블카를 탈 수도 있었고, 구불구불 자갈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선택한 것은 단지 끝이 보이지 않게 올라가고, 끝이 보이지 않게 내려가는, 깊이 파고드는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Notre Dame de Strasbourg 꼭대기까지 올라갔다온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또 미친 계단 ^^ 1/5쯤 올라갔을 무렵부터 돌아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돌아가기에는 벌써 너무 늦어버릴만큼 말도 안되게 높은 계단 끝에서 헉헉대고 있는데(결정적으로 나는 이 계단을 올라갈 순 있어도 내려갈 순 없다. 고개를 빠끔 내밀어 내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아찔한 경사) 조금 시간을 들여서, 하지만 태연하게 계단을 올라오시는 할머니 한 분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Paris에서는 언덕다운 언덕도 없고, 산다운 산은 더더욱 없다는 사실을 이 날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Basilique de Fourvière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성당 내에 작은 성당이 겹쳐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프랑스에 와서는 이런저런 미사에 자주 참석하게 되는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성당 구경을 갔다가 미사까지 구경하고 오는 느낌이지만 작년 Assomption은 Notre-Dame de Paris에서, 올 Ascension은 Notre-Dame de Strasbourg에서 각각 미사에 참석했고 예수승천일 후 첫번째 일요일 미사는 Fourvière 지하의 미니 예배당에서, 청년부가 조직한 특별미사에 참석하게 될 거라곤, 아무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만큼 비종교적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프랑스에서 내가 참석하게 되는 미사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단 차라리 문화적인 경험이라 사람들이 모두 다 어설픈 만세 자세로 'Ludia, Ludia'하고 노래를 부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영화에서 본 어떤 광적인 신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건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형식적으로 느껴져 중간에 슬몃 나와버리고 말았다.


날이 맑은 날에는 Mont Blanc까지 보인다던데, 조금의 아쉬움.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올라와 꼬불꼬불, 초록 여름색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들 사이로 난 오르막길마저 올라오고 나면 힘껏 당겼다 놓은 고무줄처럼 '탁'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Lyon 시내의 전경은 정말로 ça vaut le coûte였다. Saône강과 Rhône강,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빨간 벽돌빛 지붕들. Paris의 청회색 지붕에 익숙해진 나에게 햇빛에 바랜 빨간 지붕은 여전히 어떤 이국적임, 그리고 모든 유럽적임의 상징이기에 나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환상이 마음 끝까지 무지개빛으로 찰랑이는 소리를 들으며 Lyon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하늘을 닮은 색으로 깊어지는 호수가 더 좋았는지,
기린이 성큼성큼 걷는 동물원이 더 좋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 치고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한다는 Parc de la Tête d'Or는 lyonnais들이 사랑하는 공간이어서 couchsurfing host인 David도, 학창시절을 Lyon에서 보낸 C도 모두 Parc de la Tête d'Or를 꼭 가봐야 할 장소로 추천했고, 유럽에 온 이후 프랑스 사람들의 이 대단한 여유가 몸에 배어버린 나는 커다란 공원 어느 작은 점에 '나'의 푯말을 박고는 하늘이 예쁜 날의 오후를 한껏 뒹굴거리는 것이다. 볕이 잘 드는 그늘에 자리를 잡은 나의 손에는 작은 책 한 권이. La Terroriste는 C가 추천해준 책이라 다시 만나기 전 책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평화로운 오후가 졸고 있는 공원에서 읽기에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의 결말이 슬픈 책이었지만 어쨌거나 Alice라는 슬픈 이름은 반짝반짝 금빛으로 흘러 넘치는 오후의 햇빛을 연상시킬지도 모를 머리색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 나는 '괜찮아'라고 나 자신에게 가만가만 속삭이듯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평화롭도록 아름다운 공원에서, 더운 날씨에 반쯤 녹아버린 초콜렛 한 조각으로 나를 위로하며.
La Terroriste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호수를 따라 천천한 걸음으로 남은 오후를 산책했다. 하늘이 예쁜 날의 호수는 너무너무 예쁜 색깔. 이런 색의 사파이어라면 눈물 모양으로 깎아 적당히 가벼운,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를 가진 펜던트를 만들면 예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호수 주변으로 펼쳐진 잔디밭에서 pique-nique를 즐기는 사람들, 호수변을 건조한 바람으로 쌩, 하고 지나가는 자전거들,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느긋하게 페달을 밟는 사람들, 그리고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같은 느낌으로 엄마 오리 뒤를 뒤뚱거리며 헤엄치는 솜털같은 아기 오리들. 눈 앞을 영화처럼 지나가는 오후의 시간에 나는 마치 이 모든 것들에 경탄하기 위해 그 곳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그래서 조금은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물원. 나는 동물들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면서도 또 동시에 아이같은 마음이라 '힝, Parc de la Tête d'Or 동물원에서도 동물들이 안 움직여'하고 문자를 보내놓고도(6월 2일 Strasbourg에서도 그랬고 더운 여름 오후라 그런지 동물들의 대부분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기린을 발견하고는 어린 아이처럼 다시 마음이 벌렁벌렁 설레오는 것이다. 목이 긴 기린과, 느릿느릿 미끄러지는 달팽이처럼 걷는, 커다란 뿔을 가진 (소의 먼 친척 쯤 되어보이는) 어떤 동물과, 어릴적 상상하던 것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던 펠리컨. 나는 펠리컨 부리는 만화영화에 나오던 것처럼 단단하게 큰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펄럭펄럭, 차라리 주머니를 달아놓은 느낌이라 오잉!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는 동물원에도, 놀이공원에도 자주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놀이기구는 내가 싫어했고, 동물은 부모님이, 특히 엄마가 발작이라도 하듯 싫어하셨으니까. 동물원에 간 기억은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기 나를 제외하면 유치원 소풍을 포함해 두 번, 아니 세 번 쯤. 흔하게들 가는 동물원 소풍도 왜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안 갔나 모르겠다. 스물셋이나 먹은 딸래미가 연분홍 카메라를 들고 신이 나서는 프랑스 동물원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하는 상상은 그 상상 자체만으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통스러운 일.
'냉정과 열정사이'의 에쿠니 가오리였던가, '용서받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높은 건물이라곤 별로 많지 않은 프랑스 도시의 특성상 Lyon 어느 곳에서나 눈에 들어오는 건물.
둥근 건물과 뾰족둥글한 지붕이 색연필 같아서 crayon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확인불가.
들어가보고 싶어서 입구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입구 비슷한 걸 찾았는데
때마침 C가 보낸 문자 : '나 3분 후에 도착해'
그래도 건물 벽을 꽉 채운 창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호텔 투숙객("나도 관광객인데!" "너같이 petite한 관광객은 안 들여보내줘") 말고는 못 들어간다고 말해줘서
그나마 궁핍한 자기 위로.


저 Only Lyon은 누가 봐도 빼도박도 못할 I amsterdam의 모조품.



Saint-Cyr-Mont-d'Or를 사랑하게 된 또 다른 이유, 야경이 너무너무 예쁘다. 산 꼭대기가 가까운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밤 그림자보다 어두운 나무 사이로 노란 불빛으로 반짝이는 Lyon의 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붕을 파란색으로 장식한 Fourvière까지도. 여름의 유럽은 해가 늦게 져 Fourvière에서 Lyon의 가까운 밤을 내려다보진 못했지만(Paris도 아니고, 벌써 asiatique이 흔하지 않은 Lyon의 밤을 혼자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Saint-Cyr-Mont-d'Or에서 내려다 본 Lyon의 먼 밤은 넋을 잃고 바라볼만큼 아름다웠다. 예전의 네가 좋아하며 바라보았다던 그 Lyon의 야경을 거의 다르지 않은 위치에서 내가 다시 볼 수 있음은 또 얼마나한 우연인지.


강의 한 쪽 끝과 다른 한 쪽 끝을 연결하는 다리만 조용하게 지나는, 심지어 지도에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는 île Barbe까지 찾아간 건 순전히 C가 여기를 Lyon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너무 예쁘고, 너무너무 조용하고, 너무너무 평화로운 곳이라고, 자기의 꿈들 중 하나는 나중에 이 섬에서 사는 거라고. 차 몇 대만 드문드문 지나는 다리 위에 올라서면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만큼 자그마한 île Barbe는, 내가 아는 C라면 정말로 살고 싶어할만한 섬이었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랗고 검은 나무들과 꿈결같은 잔디밭, 섬 주변을 그림자처럼 흐르는 Saône 강과 그림처럼 서 있는 집 두 채, 그리고 지금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교회 하나와 반쯤 허물어진 먼 옛날의 성벽이 전부. 날씨가 좋은 날 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우면서도 자박자박, 자갈길을 걷는 내 발걸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강물같은 정적에 나의 아쉬움마저도 금지당하는 기분이라 나는 감히 아쉬워할 수도 없이 그저 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를 무겁게 흘러가는 Saône 강이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 너의 나이든 날들이 꿈꾸어지는 섬에 살고 있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1/12 사이즈로 제작된, 1/12 사이즈로 미니어처를 제작하고 있는 미니어처 제작자의 아뜰리에와
역시 1/12 사이즈로 제작된 화가의 아뜰리에
Lyon 여행은 사실 처음에는 여행 목적이 아니었다. Lyon Alliance Française에서 DALF 시험을 보는 김에 시험 전 주말동안 C랑 노닥거리려는 거였는데, DALF 계획을 취소하는 바람에 하는 것도 없이 Lyon에서 3박 4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Lyon에서 Paris로 가는 기차표는 교환·환불이 불가능한 기차표. 결국 Lyon에서 2박, Dijon에서 하루를 보내고, St Etienne에 들렀다가 다시 Lyon에서 Paris행 기차를 타는 걸로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St Etienne에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주변에서 다 말렸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St Etienne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온 친구도, 고등학교 때 회화 선생님이 살고 있어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친구도, Lyon couchsurfing host였던 David도, 심지어 St Etienne 축구팀을 응원하는 C도 '거길 왜 가?'라는 반응이었고, 심지어 Dijong Couchsurfing host인 Ingrid는 살면서 St Etienne에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까지 얘기했다.) 도시가 그렇게 지루하기도 참 힘들텐데. 세계 2차대전 당시 건물이 모두 무너졌었는지, 반세기 쯤이 건조한 먼지를 뒤집어 쓴 지루한 건물에 느릿느릿 거북이를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걸어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없는 도시. 원래는 St Etienne에 6시간 쯤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결국 기차표를 바꿔 2시간만에 도망나오고 말았다. Lyon으로 coming back.
다시 Lyon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모든 박물관은 오후 6시 내지 7시면 폐관이므로 나는 정말로 잘 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Guignol 박물관이냐 미니어처 박물관이냐,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미니어처 박물관을 선택한 것은 어렸을 적부터 미니어처는 내 로망이었기 때문. 지하 1층은 영화 <향수> 촬영에 사용되었던 세트장을 옮겨놓은 전시장(얘도 좀 으시시했다.), 0층과 1층은 영화에 사용된 각종 소품을 전시해놓은 무시무시한 exposition. <RRRrrr>에 사용된 소품을 보고 빵 터질 때 까지는 참 좋았는데, 엄마야, 괴물 분장에 사용된 소품들이나 사람 몸을 가지고 장난쳐놓은 소품들을은 진짜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는 공포에 내가 여길 왜 들어왔을까, 후회가 막심. 하지만 2층부터 3층까지의 미니어처 전시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 대단한 정교함에 나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딘가 편집광적인 얼굴을 상상하게 하는 정교함.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최소 1/12 크기로 제작된 미니어처 작품들 하나하나에 감탄을 했고 결국 뭔지 모를 뿌듯함으로 박물관에서 나왔을 때에는 guignol 박물관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유럽의 여름해는 말도 안되게 길어서 날은 아직 밝은데도 하루의 시간이 저버린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은 조금은 모순적이라고, Lyon에서 가장 맛있다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Hôtel de Ville 쪽이라고 막연히 짐작되는 방향으로 Saône강변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chocorange와 orange sanguine, mojito와 madelaine 조합으로 두 번을 먹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고를 수 있는 맛이 50가지 쯤 되는 데다가 대다수가 생전 처음 보는 맛인 바람에 선택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 농담을 보태지 않고서라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Lyon에 다시 가고 싶은 심정.) 미니어처 박물관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어서 guignol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것들에 대한 상상의 이름을 빌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강의 저쪽 끝에서부터 몰려오는 검은 구름마냥 몽글몽글 솟아나는 것이다.
Dijon에서 Lyon까지 오는 아침 기차에 아직 다 읽지 못한 Jules Verne의 'Le Tour du Monde en 80 Jours(80일간의 세계일주)'를 놓고 내리는 바람에(분명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에 해당되는 방송을 들었는데, 10분 안에 떠나는 Lyon발 St Etienne행 기차로 갈아탈 생각에 마음이 급해 읽던 책을 기차에 놓고 내리고 말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건 모두 Dijon-Lyon 기차가 지연되었기 때문인 거다. 말이야 SNCF 직원들과 다른 승객들의 풍부한 교양을 위하여 문화적 기부를 한 거라고, 이제 막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Phileas Fogg와 Passepartout(아직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오래 전 한글로 번역된 책을 읽을 때에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파스파르투는 프랑스어로 '모든 곳을 다 가다'라는 뜻. 기괴할만큼 정확성을 추구하는 영국인 세계일주가의 프랑스인 하인의 이름이 '아무 데나 다 가는 사람'이란 사실은, francophone 독자들에게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었을 거다.) 는 아마도 다른 독자와 남은 세계 일주를 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왠지 오래도록 남는 아쉬움.) Lyon을 출발해 Paris까지 오는 기차 안에서는 이미 다 읽은 La Terrorite를 다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활자중독인 것이다. 그게 한글이 되었건 프랑스어가 되었건 간에 나는 눈 앞에 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꼼꼼히 시간을 들여 읽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잠에서 깼을 때에는 이미 Paris가 가까운 어느 밤. 내가 그대로 비치는 창 밖이 어둠을 무심함으로 바라보며 좇은 생각은 이렇게 떠나는 여행이 나의 삶의 마지막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그 수많은 아쉬움 때문에라도 강물에 비친 여름 하늘이 예쁜 이 나라에서 내 삶의 일부를 보내고 싶다는 것. 그건 차라리 어떤 막연한 예감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배수구로 흘러드는 소용돌이같은 선고였는지도 모른다. '기다려왔던 일들이 쉽게 얻어지는 스물세살이 밉다'고 쓴 이웃님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원해왔던 것들이 쉽게 얻어지는 나의 스물셋, Paris로 돌아오는 그 까만 기차 안에서 나는 프랑스에서 보내는 나의 스물셋이 철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 덧) 네이트 메인에 떴다길래 식겁해서 내 사진이랑 남자친구 이름을 지워버렸다.




덧글
2011/06/11 05:2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그죠, 저도 저 사진 너무너무 좋아요 >_<
야 근데 왜 너 얼굴 사진 보니까 어색하지?
빨리 실물보고싶네 ㅎ
나도 오리 보고싶어, 꺅 >_<
암튼 글 잘보고 갑니다 너무 정성스럽고 느낌이 그대로담긴 여행기네요^ ^
traboule 검색하고 돌아다니다가 글 보게되었습니다!
뜬금없지만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저기 위에서 언급하신, 리옹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집!! 어딘지 알려주실수있나요 혹시? ^-^;;
지금 리옹에서 살고있는데, 아는 바가 없어서요! ㅠㅠㅋㅋ 알게된다면 꼭 가보고싶네요!!
리옹 정말 추천할만한 도시이긴 하지만 파리에서 조금 멀어요~ TGV 타고 두 시간인지 두 시간 반인지 정도 가고, 기차표 값도 만만치 않구요ㅠ 만일 리옹을 꼭 가실거라면 sncf.fr 프랑스 철도청 사이트에서 미리 기차표 예매하시기를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