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story_'미안하다'라는 말의 부재가 아쉬워서 Pour Mon Papillon

  1년만에 만난 B 언니의 졸업식이 끝나고 명동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천행 열차는 사람들의 북적임으로 가득차 서울역을 떠났다. 빨간색, Jules Verne의 책을 손에 든 나의 앞에는 등산을 다녀오시는 듯한 눈치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자그마하게 앉아계셨고 그렇게, 나의 오후는 책 속을 일렁일렁 흐르는 갠지스강의 물결을 따라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퍽 많은 오후였다. 내 앞에 앉아 연신 몸을 움직이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등산화를 신은, 아마도 피곤할지도 모를 발은 수십 번도 더 내 발을 밟았고, 할아버지의 등산용 지팡이는 조금은 덜한 빈도로 샌들 밖으로 비어져나온 내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를 헤집었다. 지하철이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불편한 상황은 자꾸만 비어져나왔다. 움켜쥔 주먹 사이로 슬몃 빠져나가는 모래알들처럼. 나의 발가락 끝을 자근자근 밟는 등산화의 묵직한 침묵에 잠겨 나는 옷깃만 스쳐도 'pardon'이라고 말하는 나라를 생각했다. "Pardon"이라는 한 마디의 말이 직접적인 불편함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의 불편함'은 몹시도 작아지는 나라가 있었다. 'Pardon'을 담는 목소리가 진심이고 형식적이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발화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의 불편한 공간이 줄어들던 나라였다. 나이든 사람이고 젊은 사람이고 하루에 십수번씩 '미안하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Pardon"은 내가 가장 먼저 배운 말이었다. 나는 그 장승같은 두 노인에게, 나의 선을 자꾸만 넘어오는 두 노인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1년, 고작 1년일 뿐인데 Pardon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어 나는 불편과, 자꾸만 재생산되는 불편한 상황에서 "자꾸 발을 밟아서 미안하네, 젊은이" 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당연한 사실처럼. 하지만 두 개, 혹은 네 개의 발이 맞부딪히고 난 뒤의 순간은 나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발간 눈과 또 한 번의 작은 불편함이었다.

  소사역,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릴 채비를 하셨다. 할머니께서 몸을 앞으로 숙이시길래 '몸을 일으키려고 하시나보다'하고 말았던 나는 내 다리와 할머니의 손이 닿았을 때만 해도 으레 그렇듯, 내리기 위해 나를 밀치시는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더랬다. 사람이 많은 열차 안에서는 흔히들 그러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내 원피스자락을 낚아채듯 잡으시더니 드러난 내 허벅지를 손으로 감아 쥐고는 '으럇차' 하는 소리와 함께 본인 쪽으로 확 당겨 손잡이처럼 지탱하고 일어나시는 거였다. 순간 번지는 황당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모욕감. 치마가 들려 올라간 내 허벅지를 손잡이로 삼으신 할머니는 그럴 의도야 없으셨겠지만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흡사 성추행이라도 당한 듯한, 몹시 불쾌한 느낌이었다. "어, 뭐야"라고 소리내어 말한 것에는 얼떨결에 튀어나온 당황스러움도 있었지만, 나를 본인의 손잡이처럼 사용하신, 서울역에서 소사역까지 내내 내 발을 소리없이 밟으시던 그 할머니가 나의 당황함을 들으시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도 나도 모르게 절반쯤, 섞여있었다. 사람과 사람들 틈에서 할머니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끝까지 '미안하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게 남은 '젊은 것이 어디 건방지게 어른 하시는 일에 말대꾸야'라는 듯한 느낌의, 노려보는 할머니의 매서운 시선과 황망한 불쾌감 뿐이었다.

  더이상 아무도 내 발을 밟지 않는 지하철 안, pardon에 대한 끊어졌던 생각은 다시 이어졌다. 젊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예의'와 '공경'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의 부재를 감내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분위기. 어느 쪽이 닭이고 어느 쪽이 달걀일까? '미안하다'라는 말은 그 어떠한 승패와도 관계없이 사실은 자신을 높이는 말인데, 이상하게 우리는 '미안하다'가 패자에게 속한 말, 스스로를 상대방의 아래에 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이드신 분들이 젊은 사람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어쩌면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비록 점점 눈이 멀어간다고는 해도) '예의'과 '공경'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 내에서 '예의'와 '공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어르신께서 '예의'와 '공경'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젊은이에게 스스로를 낮춰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의'와 '공경'은 상하적 위계관계가 아니고, '미안하다'라는 말 역시 위계질서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왜곡된 "질서"가 생겨나고 왜곡된 "감내"가 요구되는ㅇ 것일까, 누구나 'pardon'이라고 말하는 나라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늦은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수도 없이 밟힌 나의 발과 성적 수치심이 느껴질 만큼이나 세게 쥐어진 나의 허벅지에 대해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만 해 주셨어도 서로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텐데, 불쾌감이 남아있던 어제의 오후를 자꾸만 되감게 된다.

덧글

  • 2011/08/28 09: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1/08/28 11:09 #

    저는 제가 친 것이 아니어도 어쨌건 서로 부딪힌 거니까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치고가시는 분들 중에 도리어 '어른 지나가시는데 길 막는다'며 화 내시는 분들이(특히 할머님들ㅠ) 많으시죠. 울화통이 터진다기보다는 익숙하던 것이 와장창, 하고 깨어지는 소리가 당황스러운 느낌이에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서로 기분이 훨씬 좋아질 수 있는데 말이에요! 나이가 일종의 권력처럼 행사된다고 느끼는 건 저 뿐인가요?
  • 교고쿠도 2011/08/28 13:48 # 삭제 답글

    저도 점점 갈수록, 성질이 더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다 보면...저절로 쌍욕을 입에 달고 살게 됩니다. 순하고 만만하게 보이면 저런 매너없는 늙은이들에게 당할 것 같아서, 누군가가 저를 발로 걷어차면 저 역시 반격하게 되고, 밀치면 아예 까놓고 일본어로 쌍욕을 합니다.

    하아, 원래 이렇게 성질이 고약하지 않았는데...점점 갈수록 찌들어 가는거 같아요, 흑.
  • Paris rêveur 2011/08/28 21:00 #

    하지만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겠지요. bah, c'est évident que la vie n'est pas très facile....
  • 2014/10/09 18:1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5/02/14 11:53 #

    안녕하세요, 블로그를 버려둔지 너무 오래 되었더니, 이제야 덧글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래된 글들을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다니 감사한 일이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 떼어놓은 글이라도 다른 곳으로 떼어놓는 것은 퍽 내키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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