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31. 세컨드를 만들다 Pêle-mêle

  2010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계절의 파리, 프랑스. 교환학생 기간 중에 만난 남자친구와는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지난 8월부터 시차 7시간, 혹은 8시간의 초초초초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 연락 수단이라봐야 메일, 스케이프, 편지, 페이스북, 그리고 가끔씩 하는 국제전화가 전부. 만난 지야 1년이 넘었으나 그 중 절반 가량의 시간을, 우리는 북반구 반대편에서 아슬아슬,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건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있다고 말하기엔 조금 우스운 상황이라 관계의 역설적 존재는 관계의 부재보다도 더 큰 외로움이 되어버린다.
 
이 길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었더라면...

  게다가 어제는 눈마저 펑펑. 작년 겨울, 함께였던 눈 오는 날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강렬하다. 아, 옆구리 시려. 이렇게 눈이 예쁘게 쌓인 날을 혼자 보낸다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도저히 용납을 할 수 없기에, 나는 세컨드를 만들겠노라고 굳게 다짐을 한다.

  중국에서 오신 이모는 펑펑 쏟아지는 눈 때문에 결국 콜택시를 부르셨다. 공항이 아닌, 집 앞에서 긴 작별을 하고 난 후, 엄마를 먼저 집으로 들어가시게 했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으로 세컨드 헌팅에 돌입....! 장갑을 낀 손이 꽁꽁 얼고, 두꺼운 어그 부츠를 신은 발 마저도 꽁꽁 얼고 나서야 드디어 마음에 꼭 드는 세컨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저 사람 좋게 생긴 숯검댕 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 하고는...! 게다가 또 과묵하기는 어찌나 과묵한지. 꼭 입이 없기라도 한 마냥 무게감 잔뜩 싣고는 벤치에 폼 잡고 앉아있는 모습이 얼마나 늠름한지 모른다. He is just.... ideal... ♥_♥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서로 어색어색하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 온몸이 꽁꽁 얼도록 추웠지만, 그래도 이 사람 덕분에 나의 오후가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나는 나를 설득한다. 게다가 몸이 얼어붙으면 그 사람과 눈사람과 눈사람으로 동등하게 만날 수 있음은, 차라리 감사한 일이다. I was so in love with you, mon bonhomme de neige♥ but if i have to say good bye, i'll let you go. Good bye, and rest in peace.

P.S. : 이건 세드릭이랑도 한 얘기지만, 이 동네 엄마들은 공부도 안 하고 밖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저 커다랗고 철없는 애가 사실은 24살 씩이나 먹은 대학교 5학년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할 거다. 아이들을 가둬두고 공부만 공부만 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일을 그 부모들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24살이 먹고서도 아파트만 잔뜩 들어서있는 동네의 유일한 눈사람을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난 문학 공부를 할 게 아니라 유아심리학이나 유아교육학, 아니면 동화학(?!)을 공부했어야 할 모양이다.

덧글

  • DUNE9 2012/02/01 15:33 # 답글

    제목에 낚였....그나저나 세컨드가 참 쿨해보이시네요.
  • Paris rêveur 2012/02/01 15:38 #

    그러믄요 ^^ 얼마나 쿨한지 몰라요!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미덕을 갖췄다고나 할까요 :)
  • 진양 2012/02/01 15:51 # 답글

    좋은 글 보고 갑니다
  • 2012/02/01 16: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2/02/02 02:04 #

    공감하고 싶은 글귀이네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감성이 필요하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감성 못지 않게 이성 또한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네요. 줄타기를 잘 해야할텐데, 걱정이에요.
  • 2012/02/01 23: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2/02/02 02:08 #

    아이고, 과찬이셔요ㅎㅎ 생일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날씨가 무시무시하게 춥던데,S님 혹 감기 걸리진 않으셨나요? S님의 따뜻한 마음만큼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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