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유학생, 최대한 저렴하게 약식 만들기 └ S2. 2012-2013

  모든 유학생이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유학생들은 가난하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많다. 요즘 세상에 외국이라고 해서 못 구하는 게 어딨어, Paris 쯤 되는 대도시에서 재료가 없어서 뭘 못 해먹었다거나, 파는 식당이 없어서 못 사먹었다는 말은 거의 뻥이다. 한인마트에 가면 웬만한 건 다 판다. 비싸서 그렇지. 그리고 '에잇!'하고 큰 결심을 하고 물건을 집었다가도 계산대가 가까워지면 "가난한 유학생 처지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라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어서 그렇지. 

  예를 들면, 약식만 해도 그렇다. 사 먹으려면 얼마든지 사 먹을 수도 있고(심지어 파리에는 떡집까지 있다), 재료를 구해서 해 먹으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해 먹을 수도 있다. 물론 재료가 비싸다. 좀 많이. 나는 약식 귀신인데, 어제 밤에 엄마랑 스카이프를 하다보니 약식 얘기가 나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 밤중에 약식이 오지게도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진짜로,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로!) 약식을 해 먹기로 했다. 하지만 난 가난한 유학생이니까 최대한 저렴하게,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대체할 수 있는 재료는 과감히 대체해서.

준비물 : 찹쌀 1컵 반, 맵쌀(일반 쌀) 반 컵, 물, 간장 2Ts, 참기름 2Ts, 대추차 크게 3Ts, 계피가루 약간, 견과류(호두, 호박씨, 잣, 해바라기씨, 건포도 - Salad'Futée l'ensoleillée), 밤 통조림(Carrefour Bio Châtaignes entières)

먼저 찹쌀을 불린다.
급하면 2시간, 그렇지 않으면 5시간 정도 불리면 되지만 
나는 담가놓고 도서관 갔다 오느라 근 10시간은 불린 것 같다.
워낙에 찹쌀을 좋아해서 찹쌀은 원래 방에 있었다. 
한인마트 가면 Riz gluant이 1kg에 4.2유로.
일반 백미가 1kg에 2.9유로인 걸 생각하면 겁나 비싸지만 찹쌀은 내 밥 철학의 필수품이니까.
처음에는 2컵 하려다가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한 컵 반으로 줄이고 나중에 맵쌀 반 컵을 더 넣었다.
저렴함을 내세우는 약식 주제에 물은 Volvic. 
여기 애들은 수돗물 잘만 마시지만 나는 냄새가 싫어서 꼭 생수 쓴다.
도서관에서 오는 길에 그 흔한 까르푸에 들러 재료를 사왔다.

호두나 잣 같은 견과류를 일일히 따로 사려고 보니 인간적으로 좀 많이 비싸서 포기하고, 
Dacobello라는 회사에서 파는 안주용 견과류 칵테일을 하나 사 왔다. 
Salad'Futée L'ensoleillée 두 묶음에 125g짜리 하나 사면
호두, 잣, 호박씨, 해바라기씨, 건포도 다 들어있고 2.7유로.

밤도 marron이나 châtaigne 생으로 파는 거 사와서 껍질 까면 비싸고 손 다칠 위험이 있으니까 그냥 통조림.
더 저렴한 진짜 '통조림'도 있었는데 방에 통조림 따는 도구가 없어서 그냥 병에 든 걸 사왔다.
Carrefour Bio Châtaignes entières 210g에 3.99유로.
유기농이라 까르푸 PB제품이어도 비싸다.
두 배 정도 되는 사이즈가 4.70유로였나, 상대적으로 저렴했는데
허구한 날 약식만 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작은 거 샀는데 후회된다.
밤 특유의 단 맛이 덜 하긴 해도 맛밤 맛이랑 비슷해서 두고 주워먹고 싶다.
참고로 marron과 châtaigne의 차이점은 날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일단 한국의 밤이랑 비슷한 건 châtaigne)
가을에 가로수에서 많이 떨어지는 건 marron인데 marron은 일단 껍질이 덜 고슴도치같고
날로 먹을 경우 독이 있어서 반드시 익혀먹어야 한다.
대신 marron glacé나 crème de marron같은 디저트는 marron으로 만든다.

원래 약식을 제대로 하려면 대추를 우린 물로 밥을 앉히고 대추도 꽃대추를 만들어 넣어야 하는데
나에겐 말린대추가 없다. 비싸다.
그래서 그냥 방에 있던 대추차로 대체하기로 했다.
한인마트에서 사 와서 겨우내내 타 마시던 복음자리 대추차를 넣으면 
대추차 자체가 대추 57%, 대추채 3%, 정백당 40%라 따로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된다.

한국인의 필수품 간장이랑 참기름은 원래 방에 있던 거.
오늘 한인마트 갔다가 검정콩을 사왔는데 그것도 넣어봤다.
미리 한 시간 반 쯤 불렸다.

(중요한 사실 : 이렇게 하고 나면 견과류랑 밤이 약식 한 번 더 해먹을만큼 남는다!)
내 방에는 바가지가 따로 없어서 그냥 밥솥에 쌀을 불리고, 거기다가 바로 준비했다.
밥물은 평소 밥 하는 것보다 조금 넉넉하게 잡았다.
거기에 대추차를 밥 숟가락으로 듬뿍 세 숟가락 풀고(잘 풀린다)
같은 밥 숟가락으로 간장 두 숟가락, 참기름 두 숟가락 넣고 휘휘 저은 다음
견과류를 한 묶음 다 투하했다.
'너무 많은가?' 2초 고민하다가 어차피 약식에는 견과류가 많이 들어가야 맛있으니까 그냥 다 넣었다.
나는 밤 완전 좋아하니까 밤도 10개 쯤 우두두 투하.
나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세 스푼 넣고 말았는데 달달한 레시피라면 대추차나 설탕을 더 넣어도 되고.
(참기름이 둥둥 떠서 사진이 좀 역겹다.)
기숙사 공용 주방으로 올라가서 그 상태로 취사.
밥솥이 여기서 산 0.6L짜리 현지 밥솥이다보니 기능이 '취사' 하나 뿐이다.
압력밥솥에 강낭콩을 찌고 있던 인도 여자애랑 겁나 수다 떠는 사이에 약식이 보글보글!
인도애랑 '역시 밥 하는 도구는 아시아가 갑이다' 막 이런 얘기 하니까 되게 웃겼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밥솥, 소화할 수 있는 최대 분량을 밀어넣었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앉혀놓고 설거지도 하고, 인도애랑 수다도 떨고, 책도 읽고, 페이스북도 하고, 카톡도 하다 보면,
크아, 맛있는 냄새!!!!!!
일단 밤이 으깨지지 않도록 살금살금 조심조심 골고루 뒤집어주고
완전 저렴한 대신 완전 허접한 유럽 밥솥은 뜸 따위 들일 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뜨거울 때 다시 뚜껑울 덮고 10분 내지 15분 정도 기다렸다.
약식은 방금 해서 따끈할 때보다는 한 김 식은 후에 먹어야 더 맛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식으면서 더 달아지고 맛도 더 균등해진다.
그래서 일단 뜨거운 상태에서 통에 담아 식히는 중!
다 식고 나면 내일 아침에 한 끼 분량씩 랩으로 싸서 얼려두면 당분간 도시락 걱정은 끝!

  프랑스 파리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만 야매로 준비한 거라 대추를 끓여서 한 것처럼 은근한 깊은 맛은 없지만 그래도 지이이이이인짜 맛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내가 지금 여기 공부하러 온 건지, 밥 해먹으러 온 건지 헷갈리고 있는 이 마당에ㅋㅋㅋㅋ

  원래 남들 보여주는 포스팅은 안 하는 블로그지만, 혹시나 혹시나 약식이 너무 먹고 싶을 다른 유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 절반과 잔머리 굴린 건데 너무너무 맛있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 절반으로, to the Valley!

P.S.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칼날 세워 잘라서 랩으로 하나씩 다 싸놨다.
지금은 당장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빼놓고는 모두 냉장고 안으로!
이제 아침에 하나씩 데워가거나, 일찍 나가는 날은 그냥 들고 나가서 자연해동(?)하면 된다 :)
유학생 도시락 준비 끝!!



덧글

  • sweeTHEart 2013/01/25 14:30 # 답글

    저도 약식 좋아하는데! 부지런하신 살림꾼이셔요 :-))
  • Paris rêveur 2013/01/25 17:15 #

    안녕하세요 :)
    한국에서는 약식 사 먹기도 좋고, 해 먹기도 좋아서 집에서 진짜 자주 해 먹었었는데, 여기 오니 쫄깃달달한 그 맛이 너무너무 그립더라구요ㅠ
    그래도 프랑스 와서 혼자 생활하다보니 자연히 살림꾼이 되더라구요ㅠㅠㅎㅎ
  • Je suis Lisa 2013/01/28 03:54 # 답글

    떡집이 어디있나요!!!!!!! 으아니
  • Paris rêveur 2013/01/28 05:45 #

    인터넷에 파리 홍떡집 검색해보세요 :)
  • 리얼리스트 꿈꾸다 2013/02/08 06:23 # 답글

    천재시네요.... 누군가 제게 요리블로그로 이 블로그를 추천할만 하네요. 아무튼 좋은 정보 감사해요. 이번 구정 때 약식 덕분에 조금은 덜 외롭겠네요.
  • Paris rêveur 2013/02/08 07:16 #

    칭찬으로 감사히 듣겠습니다 :)
    제 블로그가 요리블로그는 아니지만 유학생활 하면서 이것저것 해먹고 사는 이야기를 올려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구정 잘 보내세요 ^^
  • 2013/09/21 00:4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Paris rêveur 2013/09/29 02:28 #

    아, 그렇군요! 몰랐던 사실이에요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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